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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이른 가을...: 2022-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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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 만 우
댓글 0건 조회 225회 작성일 22-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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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이른 가을... / 이 만 우

병원에서는 약속했어도 삼사십 분 대기는 보통이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처사에 기분이 쩝쩝한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흔히 말하는 갑을 관계인가. 병원은 갑이고 나는 을. 그래도 나름대로 이 기다림을 잘 활용하려 책 한 권쯤은 들고 간다. 책을 뒤적이다 꽂히는 글귀를 발견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차례를 놓친 적도 있다. 눈을 쉬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충고에도 병원에서조차 부담을 주는 어리석음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처음 방문했을 때와는 달리 주위 분위기에는 관심 없이 오늘도 습관적으로 귀를 반쯤 열어 놓고 사사키 후미오의 간편하게 살기로 했다를 펼쳐들고 있다.

어쩌다 안과 병원에 단골손님이 되었는지. 망막에 이상이 생겨 매월 정기 검진이 필요하다고 한다. 70여 년을 혹사하고 변변한 돌봄 없이 지냈으니 눈이 몹시 화가 난 모양이다. 책 읽는 재미가 소록한데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TV는 이미 단절시켰고 스마트 전화기와 컴퓨터 화면은 업무상 필요 이외에는 보지 않는다. 언제나 병원 대기실에는 만원이다. 환자들은 대개 치료 후 운전을 할 수 없어서, 혹은 연세가 많으셔서 보호자를 동반하니 더욱 그러하다. 나도 아내를 동행했던 적이 있다. 처음 이 병원에 들어섰을 때 웬 눈 아픈 이들이 이리 많은지 하며 의아했다. 사람이 많은 것은 둘째 치고 모두가 노인이라는 사실이다. 모두 편안한 옷차림에 차분한 모습이 처분만 바라는 모습에 마음이 쓰인다. 내가 올 곳이 못 되며 어쩌다 나는 잠시 들렸다는 생각도 슬쩍 스친다. 후에 아내에게 심경을 비추었더니 "당신도 손색없는 대열에 한 사람이야." 라며 비씩 웃는다. 동네 병원이다 보니 팔십 중반의 아는 이도 눈에 뜨인다.

인생을 90으로 보고 축구에 비유한다. 60까지는 전반전 90까지는 후반전 그 후로는 연장전이라 하던데, 병원을 찾은 이들은 전 후반 그리고 연장전까지 몸 돌봄도 잃고 열심히 뛰다가 다친 것이 분명했다. 펼쳐 온 전 후반의 인생 경기 내용이 살짝 궁금해진다.

 차례가 되었다. 나를 부른 간호사 앞으로 다가갔다. 은빛으로 곱게 연륜을 다져온 칠십 대 중반쯤 보였다. 개인정보 확인과 그간 눈 상태 변화를 묻고 또박또박 받아 적는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적어 내려간 글자에 눈길이 따라갔다. 모양 크기 쓰는 속도가 타자기가 쳐 내는 모습 그대로 였다. 어떻게 그리 잘 쓸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어려서부터 엄마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낙서이건 작문이건 숙제이건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다고 한다그래서 거듭에서 거듭으로 늘 하다 보니 펜을 잡으면 자연스레 써진다고 한다. 나의 졸필과 비교되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습관의 중요성을 새삼 다시 느껴본다. 오늘 이방에 기다리는 이들, 모두가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반복과 반복을 거듭하여 자기도 모르는 성공 사례를 가슴에 담고 있으리라.

 참 대단하시네요.” 다시 칭찬의 말을 건넸더니 무슨 책을 늘 열심히 읽느냐고 되묻는다. 나는 간단하게 살기란 책을 보여 주며 내용 설명도 약간 곁들였다. 그분은 빙그레 웃으며 삶에 고민이 많은 것을 보니 젊게 사는 모습이 좋다.”하며 칭찬으로 응수한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면 책 없이도 절로 그리되는데 공연히 눈을 괴롭히지 말라요.”하며 가벼운 충고도 준다. 왠지 이 말에이 그분을 다시 쳐다보게 한다.

세월이 약이라는 어느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어차피 홀로 감당해야 할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덜어보려 이리저리 책을 뒤적이고, 다른 이의 삶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때로는 신에게 빌어 보기도 한다. 하지만 간호사 말 처럼 진정 선생은 세월인 것 같다. 살아온 순간순간 낯선 곳에서 혹은 익숙해진 곳에서 스치고 스친 아픔 행복 미움 기쁨 등이 참인 양 착각하여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 놓고 괴로워 하며 살아 왔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이 인연들은 무시무종의 광활한 세계에서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을 때마다 나를 끌어내려는 안내자이고 아바타이었다.

오늘도 진찰도 받고 한 수 배우고 병원 문을 나선다. 주차장에는 제 몫을 다 한 단풍잎이 바닥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다. 몇 달 전만 하더라도 피어오르는 연두 잎과 꽃망울로 나의 눈길을 빼앗더니, 어느새 꽃은 간 곳 없고 푸른 잎마저 노랗게 빨갛게 물들려 내려놓고 앙상한 가지만 나를 맞이한다. 몇 남지 않은 잎마저 잡을 힘이 없는 듯 바람에 한잎 두잎 실려 보낸다. 여름 내내 꽃을 피워내려 몸을 던지고 이젠 잎 마저 떨어낸 호젓한 나무가지, 가족 돌봄에 온 힘을 다 쏟다 병상에 누워저 몸을 일으킬 때마다 드러난 아버지의 굴곡진 등뼈같아 안쓰럽기 짝이 없다. 어느 날 이 모습을 내 아이들이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공연히 궁금해진다. 가지가지 사이로 드높은 하늘이 보인다. '설마' 하는데, 마음은 이미 눈길 쫓아 그곳으로 따라 나선다. 창공에 흐터진 구름처럼 희미한 내 삶의 계절, 봄은 아득한 추억, 여름에서 쫓겨나 낙엽을 밟고 선 이른 가을에는 벌써 뒤죽박죽 겨울기운이 맴돌고 있다.

   

글새김- 겨울이 쫓아 온다고 가을이 성화를 부림니다. 아직도 손도 못 댄 해야 할 일들이 많고, 하던 일도 시간이 더 필요하다 버터 보지만, 여름은 하는 수 없이 바지를 털며 갈 채비에 나섬니다. '내 진작부터 이럴 줄 알았다니까.' 라고 궁시렁 거리면서. 오랜 병고를 치르시고 이른 가을에 하늘 나라 로 가신 아버지도 잠시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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