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필] 종소리는 아직 유효하다: 2018-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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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는 아직 유효하다 이만우 - 무술년 첫날(1/1/2018
한 해를 보내며 새해를 맞는 인파속에 카운트다운 폭죽 소리가 요란하다. 그래도 매년 연말이면 귀전에 맴도는 제야의 종소리를 앞도하지는 못한다. 한해를 영원 속으로 밀어 넣으며 살아옴을 근엄하게 돌아보게 하고 성큼 다가오는 희망의 새해에 문을 활짝 열어주는 묵직한 종소리, 어린시절 들어본 그 보신각 제야의 종소리를.
여느 때처럼 새해 첫날 해돋이를 맞으러 발디산 정상으로 나섰다. 중천에는 밝은 달이 한해를 가르는 지점에서 갈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고속도로 주변의 도시 불빛은 새날을 환영이나 하듯 반짝인다. 산자락에 도착했다. 밤이 깊어 가니 달도 서산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 소나무 숲 사이로 달려온 도시 빛과 하늘에서 쏟아진 별 빛이 소나무 가지에 매달린 모습은 현란하게 장식한 크스마스 트리 이상으로 아름답다. 눈이 없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예년 같으면 달빛을 받은 하얀 눈이 면사포처럼 다소곳이 산쟁이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랜 가뭄 때문에 산길에는 눈 대신 푸석한 먼지가 나른다. 산길에서 스친, 이 산에서 17년간 레인저로 봉사한 데이빗이 눈 없는 새해 첫날은 처음이라며 머리를 저으며 새해 첫 인사 말을 대신 한다. 달 빛속에 돌부리가 어렴프시 들어낸다. 이 돌부리에 차인 발길이 만든 소리가 고이 잠든 계곡식구들의 귀를 거슬린다. 우리는 종종 이상기온이라 말하지만, 자연은 자기의 모습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새로운 모습 때문에 같은 산일지라도 반복해서 찾는지도 모른다.
산이 얼마나 좋킬래 같은 산을 또 가고 또 가느냐고 질문을 받곤 한다. 일전에 이곳을 800번 방문하고 영원한 산 사람이 된 이가 있다. 이것이 답이다. 나도 200회 이상 족히 찾았을 것이다. 때로는 야간에, 오늘같이 새해 첫날 정상에서 해돋이를 맞이하러 심야에 오르곤 했다. 자연은 낮에 참모습을 밤에 속내를 보여준다. 어쩌다 정상에서 밤을 지새우면 우주는 보답으로 비밀을 조가조각 던저 준다. 같은 산을 고작 몇 차례 들렸다고 자연의, 우주의, 해돋이의 엄청난 비밀을 얼마나 보고 알았겠는가.
아기가 뱃속에서 상상했던 엄마의 모습과 세상의 모습이, 세상에 나와 처음 대면한 엄마의 얼굴에서 주위에 나타난 세상에서 느끼는 신비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태어났을 때 품었던 나의 궁금증을 과연 얼마나 풀었을까. 자연과 우주의 어마어마한 비밀에 비교하면 그간 내 앞에 나타난 신비란 보잘 것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고산지대인 네팔지역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산, 남미 페루 안데스산맥 꼬디아 브랑까의 우와스가란산, 알라스타지역의 디날리산(구 매킨리)을 등반에 참여한 적이 있다. 국내 고산들도 오르고 내렸다. 이들 고산에서 나만의 설렘이 늘 가슴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연유로 몇몇 단체에서 산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지면에 연재도 했다. 얼마나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궁금하다. 자연의 신비를 털끝만치도 보지도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앞에 서고 지면에 나섰다. 지금 생각하니 경청해 주시고 읽어주신 이들에게 송구스러울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경구가 있다. 금강경에 적힌 글귀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즉, 무릇 모든 상(相-보이는 것, 생각하는 것 등등~)은 허망하다. 만약 그렇다는 것을 알면 곧 깨달음을 만난다. (불교식-부처님을 만난다. 기독식-하나님을 만난다).
이러할진데 겨자씨만 한 지식을 가지고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하며 시끄럽다. 그러나, 자연은 시비하지 않고 그저 다가가기만하면 받아주고 포근하게 감싸준다. 사람들이 자연에 횡포를 부려도 화를 내거나 야속하다는 내색이 없다. 그래서 그곳으로 향하나 보다. 도인들은 세상도 산이라고 하던데 나도 한 번쯤 흉내 내 보려지만 어림도 없다.
마른 바람이 차갑다. 정상이 가까웠음을 말한다. 가파른 경사가 만든 이마의 송글송글한 땀을 새해 첫 바람이 시원하게 씻어준다. 밤을 지새웠어도 머리가 맑다. 하늘이 서두른 자에 주는 멋진 보상이다. 첫날 새벽 나의 존재인 이 모습 싫지 않다. 서녘 하늘이 자주색 기운이 돈다. 해가 멀리서 다가오는 신호다. 밤새 휘황찬란했던 도시 불빛이 점점 쇠약해진다. 밤새 등불이 되여 준 달은 갈 채비를 마무리하며 팜데일 쪽 산 능선에 반쯤 걸터앉아 있다. 해를 잠시라도 보고 떠남을 기대하다 태양이 나타나자 서서히 잠긴다. 별들은 이미 하늘 어디엔가 꼭꼭 숨어 버렸고 시야에 펼쳐진 산야는 새해를 맞이하러 하나둘 기지개켜며 일어나기 시작한다.
높아질수록 눈 덮일 때보다 더 차가운 바람이 몰아친다. 동녘 하늘에는 해님을 맞이하려는 여명의 물결이 새로운 모습으로 펼쳐진다. 신의 손길이 슬쩍 스친 저 놀라움, 사람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흉내내는 일조차 가능이나 한가. 상세히 보면 일출 광경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습은 매일매일 새롭다. 태양이 서서이 모습을 드러낸다. 눈이 부시어 쳐다볼 수가 없다. 주머니에 웅크렸던 주먹을 꺼내 손을 활짝 펴며 두 팔을 높이 든다.
무술년 만세! 눈을 감고 무슨 소망이든 외치고 싶지만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주시는 이, 이루게 하시는 이는 아마도 이미 다 알고 있으리라. 장렬하게 떠오르는 태양의 희망찬 에너지가 온누리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세상에 나와 눈을 떴을 때 맞이한 그 신비함이 살아온 살아야 할 시간과 함께 어울려 지금이란 종소리로 다시 다가온다. 육중한 보신각 종소리처럼. 제야의 그 종소리도 아직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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