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 번째 산행-그분을 기리며: 2017-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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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번째 산행-그분을 기리며 (5/20~21/2017 Mt. Baldy 10,064ft)
계절이 뒤죽박죽이다. 봄인가 싶었는데 가을이고 갑자기 겨울이다. 어디에 기대야 할지 모르겠다. 불과 이 주 전에 눈과 얼음으로 뒤덮은 길을 걸었는데, 오늘은 온종일 팔구십 도의 열기를 뿜으며 이글이글 거리를 달구더니 산길에는 먼지까지 이른다. 오후 끝에서야 기세가 꺾인 듯 검붉은 여운을 남기고 해는 바다로 서서히 잠긴다. 잠시 이를 보고 있노라면 젊음이 시드는 것같아 기분이 을씨년스러울 때가 있다.
오늘은 이미 산이 된 선배의 혼을 기리는 뜻있는 날이다. 발디 산 1,000 번을 등정 목표로 했던 80수 원로 산악인이 200 번을 남긴 체 얼마 전 이 산에서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 한을 달래기 위해 그분을 기억하는 산악동료 200인이 함께한 행사격인 산행도 있었다. 매년 5~10번 정도 20여 년간 등락여 정이 깊은 산인데 오늘 밤 산행은 이에 동참하려는 데에 의미를 두어 특별하다. 그분에게는 1,001번째 산행인 셈이다. 밤 10시경 정상에 섰다. 시야에는 저 아래 세상 등빛과 하늘 별빛이 경쟁이나 하듯이 현란하게 반짝인다. 어디에 시선을 둘지 망설여진다.
정상에는 텐트 두 동이 조용히 불을 밝히고, 중심 돌무덤 안에는 내일 열리는 산악 마라톤 종점 문이 만일의 바람을 피해 누워있다. 의외로 바람이 얌전하다. 정상 마크 옆에 세워진 방향과 거리를 알린 표지판 기둥에는 고인을 기리는 문구가 담긴 추모지가 사진과 함께 감싸고 있다. 숙연한 마음이 앞선다. 발디 정령은 무엇이 섭섭하여 해마다 소중한 생명을 요구하는지, 최근 몇 년 사이 대충 기억해서 희생자 수를 세어보니 열손가락이 모자란다.
트레일 입구에서 어름잡아 2마일 지점에 대피소 겸 산장격인 스키헛이 있다. 이곳을 지나서부터 정상까지 정해진 길이 없다. 각자 편한 데로 순간순간 어려움을 피해, 남이 어설프게 만든 발길을 따라 또 나만의 길을 만들어 간다. 그때마다 길은 패이고 부서져 경사면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오늘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곳을 지나 왔다. 어둡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무심코 신성한 산을 마구 짓밟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매년 일어나는 사고는 파괴적인 행위에 정령이 노해서 내린 재앙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곁들인다. 자연은 조화롭게 함께 지내야 할 동반자이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늘 입에 달고 다니지만, 급경사를 오르면 힘에 부딪힐 때 자기 중심이 되어 주위를 보살필 여유를 잃어버리기 쉽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막상 산행이 시작되면 정상에만 마음을 꽂고 시간을 계산하며 서두른다.
더 빨리 쉽게 가려면 화석에너지를 이용한 기계의 수단을 빌려도 되지만, 이는 자연의 관점에서는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주위 주변에서 반김으로 기다리는 자연의 식구들을 무심코 지나치게 한다. 그러나 내 발로 나의 순수 에너지로 마음, 영혼과 함께 속도를 맞추면, 온 공간에 신비스런 존재들이 때 마다 새롭게 다가온다. 또한, 시간을 멀리한 고산 등반에서는 육체가 힘든 만큼 마음은 깊고 넓게 영혼은 드높은 곳으로 안내한다. 이러한 단순하고 자명한 사실을 일러주려 정령은 기다리고 기다렸으나, 끝내 우리는 귀와 눈을 돌리니 누군가를 희생시켜서라도 깨우침을 주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나를 위한 누군가의 희생, 가슴이 울컥 치솟는다.
바람막이 돌담 앞에 침낭을 폈다. 오리털 고치에 몸을 구겨 넣으니 안방 침대보다 더 따스하고 편안하다. 고치 구멍으로 얼굴만 내민다. 마치 어린아이 손이 스치듯 산들 바람이 뺨을 살살 집고 넘어간다. 이제 세상 빛은 사라지고 하늘에서 쏟아 내리는 별빛이 눈을 가득 채운다. 잠을 청하나 도무지 찾아오지를 않는다. 잠을 잤는지 꿈속만 헤메였는지, 공상의 날개를 펴고 훨훨 날고 왔는지, 고치 안에서 뒤적거리니 시계는 벌써 새벽 세시를 가리킨다. 차가운 몸은 더 있기를 원하지만 이를 뿌리치고 고치에서 빠져 나왔다. 마음은 이미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해가 솟아오를 때까지가 나의 진정한 산행이다.
손톱 끝 만한 초생달은 샛별을 대동하고 중천으로 향하고 별들은 태양이 오기전에 남은 빛을 다 쏟아내려 안절부절이다. 다운타운, 웨스트 엘에이, 팜데일, 빅토빌, 팜스프링, 롱비치 등불이 경쟁하듯이 빛을 토해낸다. 몸은 발자국으로 정적을 산산조각 내며 정상을 어스렁이고, 마음은 이미 세상 빛 속으로 뛰어 들어 삶을 두리번거린다. 먼저 떠난 이들을 보고 싶어서인지 영혼은 훨훨 날아 끝없이 펼쳐진 별무리 사이를 뒤집고 다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 갔을까. 어김없이 새날을 밝히려는 여명이 나팔소리와 함께 동녘 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산 정상에서 일출을 맞이하면 희망과 역동적 생명이 달려오는 소식을 보고 들을 수 있다. 저 밑 세상의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는 빛은 내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낱낱이 밝히며 어서 내려오라 하고, 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빛은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하나 보여주며 서서히 물러난다. 이는 정상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귀한 장면이다. 시인 타고르는 “어리석은 자는 서두르고, 영리한자는 기다리고, 현명한 자는 정원으로 간다”고 했다. 삶에서 잠시라도 머무러보고 빗겨가기도 하고 때로는 한 발 물러서는 여유를 시사하는 바일 것이다. 나는 이에 “지혜로운 자는 산을 찾는다”. 라고 부언하고 싶다. 역으로 "산을 찾으면 지혜로워진다". 란 말도을 첨 해도 조금도 어색치 않다고 본다. 산이 된 영혼들이여, 원 없이 한 없이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며 편히 쉬소서!
산이 된 그대
유난히 반짝이는 별
나를 향해 내리는 달빛
산이 좋아 산이 된 그대 이겠지
이마에 땀을 날리는 바람
나를 위해 보내준 이
산이 좋아 산이 된 영혼 이겠지
정상을 서성이며 님을 기린다
그대는 바람 별 달 고요
늘 함께 어우러 춤추고픈 산쟁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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