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의 결투, 랭리에서: 201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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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의 결투, 랭리에서 / 이 만 우
밤새도록 불어대는 쇳소리는 자장가로 쓰기에는 너무 거칠었다.
차라리 일어나자. 예정보다 일찍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에 침낭에서 나왔다. 여유롭게 배낭을 챙겨 랭리산 (Mount Langley 14,037 ft) 정상으로 향했다. 목마름에 지친 산야 식구들은 모두가 꿈속, 대낮처럼 환희 비추는 보름달과 질세라 반짝이며 제모습을 알리는 별들이 산길을 안내한다. 마구 불어 대는 찬 바람은 가슴으로 파고들어 깊숙이 모여 있는 삶의 응어리를 조각조각 날려버린다. 가슴이 후련하다. 마른 가지에 매달린 마지막 잎새, 떨어지지 않으려 안 간힘 몸부림치며 무슨 말을 전하려는 듯 애절한 눈빛을 보낸다.
가뭄 속에서도 어딘가 숨었다가 뛰어나와 바다로 달리는 물길이 바위를 만나 부딪치는 소리, 정상으로 향하는 힘든 길을 예고하는 발자국 소리가 깊은 정적을 깬다. 어서 등을 밟고 물길을 건너라며 덥죽 업드린 통나무, 옛 것은 어디로 가고 생생하고 더 큰 낯선 놈이 누워 있는가. 예사롭지 않게 궁금하다. 다리를 서너 개쯤 건넜을까 어느새 호수가 모여 있는 커튼우드 호수(Cottonwood Lakes) 지역에 도착했다. 양옆에 늘어선 호수에 비친 달과 별들이 하늘 높이만큼 깊은 곳에서 물결 따라 출렁인다. 보는 마음도 함께 흔들린다. 서녘에는 아직 보름달이 능선에 아직 걸쳐 있는데, 성급한 동녘은 붉은 융단을 펼치며 해님이 납시기를 기다린다. 강풍만이 사이를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이런 상황이라면 알래스카 북극에서나 볼 수 있는 오로라가 만들어지기 충분하다. 아닐새라, 고봉을 넘어넘어 달려온 떼 바람이 다시 몰아치더니 서녘 하늘에는 연푸른 나래를 편 오로라가 선듯 선듯 나타나 칼춤을 추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야간 산행의 진수이며 극치이다. 부지런한자에게 내리는 하늘의 선물이다.
돌무덤 경사면을 지그재그로 오르니 능선에 이른다. 하이 씨에라(High Sierra)가 한눈에 들어온다. 드높고 광활한 산맥이 가슴에 부딪치면서 시원한 느낌이 온 몸을 푹 적신다. 오늘 같은 악천후를 견디면서 천천히 오르는 재미는 고산에서만 느끼는 별미이다. 이에 눈보라가 가세하면 더욱 좋았을 것을. 레인저가 말한 눈은 다 어디로 도망쳤는가. 뒤 따라오던 이들은 다음을 약속하고 돌아간다고 손짓한다.
돌 무리가 늘어선 이곳은 여름이면 먹이를 달라고 졸졸 따르는 맘모(Marmot)라는 꼬마 뚱뚱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이사이 발자국이 만들어낸 뱀같이 길게 늘어진 길만이 기다린다. 이 마일 정도 완만하게 늘어선 돌길을 따라 산을 돌면 모래와 바위가 뒤섞인 급경사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 벽을 살피면서 자기만은 쉬운 길을 찾아 기어올라야 한다. 처음인 이는 다 오르면 정상이 기다릴 것 같은 마음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능선에 서보면 정상은 어디인지 가늠키 어렵다. 돌판과 모래로 뒤덮인 넓은 경사면만 보인다. 기진맥진하여 뒤돌아보면 더 쉬운 길이 있음에 아쉬워한다. 다음에는 저 길로 하며 그 위치를 눈 여겨 보지만 막상 그 길도 가보면 과연 그 러한지. 원래 안 가본 길이 쉽게 보이고 아름답지 않는가. 산 너머 산, 구비구비 또 구비라는 말도 있다. 산행 때 늘 떠오르는 말이다. 이 길이 처음인 이에게는 정상이 어딘지 가늠키 어렵지만 고맙게도 군데군데 누군가 돌무덤을 만들어 놓아 정상으로 가는 방향임을 암시한다. 몸조차도 지탱키 어려운 바람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으니 방향 지킴이 쉽지 않다.
오늘은 북풍과 북서풍이 뒤죽박죽 불어댄다. 산들바람은 땀을 식혀 주고 힘찬 바람은 때로는 등을 밀어 준다. 고맙기도 하다. 바람과 결투하며 스스로 길을 찾고 만든다. 고소에 적응하려 호흡을 조절하면서 느릿느릿 갈짓자 걸음으로 앞으로 앞으로, 어느덧 정상에 이르렀다. 장시간의 피로가 확 가시는 순간이다. 코코란(Mount Cocoran), 르콘테(Mt. LeConte), 말로리(Mt. Mallory), 맥카디(Mt. McAdie)등 고봉들이, 미 대룩의 최고봉 위트니(Mt. Whitney14,495 ft)도 목전에서 어서 오라 손뼉치며 반긴다. 롱파인 마을에 집들이 장난감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도 보인다. 그 속에서 구비구비 희비애락을 맛보며 소설 같은 얼룩진 인생사를 엮어 가고 있을 것이다. 개미 크기만한 사람들의 오감을 살피나 도무지 찾을 길이 없다. 세균 정도 크기나 되려나. 산행시 무심코 밟아 버린 개미들이 눈에 선하다. 어디 개미 뿐이겠는가.
바위틈에서 철 고리에 묶인 체 외롭게 웅크리고 있는 철재 통이 보인다. 방명록이 들어 있다. 간신이 비집고 ‘이만우 2016년 10월 16일 오전 11시 거센 바람과 함께 잠시 머물다’ 라고 어색한 필체로 적어 놓는다. 혹시 언젠가 지인이 방명록을 들척이다 내 이름을 보면 바로 이곳에서 나를 기억해 달라는 바램으로.
모진 바람속에서도 곧게 잠든 소나무, 끝까지 매달리려 최선을 다하는 마지막 잎새, 금시 떨어질 것만 같은 돌무덤에 작은 돌, 날아갈 것 같지만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는 모래처럼 내안에 조금이나마 쌓인 내공이 단단해지기를 기대한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한가. 랭리 식구처럼 되려면. 쉬워 보이는 많은 길들이 보인다. 그래도 오늘 힘겹게 오른 길에 눈길이 다시 간다. 마음은 성취감에 젖어 있는데 칼바람은 여전이 볼을 후려치고 스쳐간다. 그래도 바람아 너를 사랑한다. 새벽부터 열여섯 시간 동안 이곳을 안내한 오늘에 내 길아, 너도 무척이나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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