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새해 첫날: 2017-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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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 발디 산(Mt Baldy 10,06 ft)에서 / 이만우 (1-1-2017)
새해 첫날 해맞이에 발디 산은 왜 나를 늘 초대하는지. 이 새삼스런 의구심이 그곳으로 향하려는 나의 발목을 잡으려한다. 하지만 이를 박차며 집을 나섰다. 지난해는 자정에 정상으로 불러내더니 올해는 새벽에 오라 한다. 예년 같으면 여명이 꿈틀거릴 시간인데 먹구름이 드리운 동쪽 하늘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아직 컴컴한 절벽이다. 평일도 해돋이가 장열하면 충만한 느낌이 있어 좋은 하루가 예고되는데, 신년 첫날 해는 왜 나타나질 않고 구름 뒤에 꼭꼭 숨어 궁실거리는지 모르겠다.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눈이 마주치던, 어둠속 주차장에서 어렵프시 알아보고 인사하던, 존, 신이찌, 리처드... 매년 만나던 산쟁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어제 밤 지새도록 해님과 한잔하고 늦잠 자고 있는가. 아니면 세월 탓인가.
하늘이 기분 좋은지 첫날을 치장하려 연속 눈을 내려놓고 손님을 맞는다. 구름 속에 숨었던 해도 느지막하게 발디 정상을 비추며 모습을 알린다. 나무에는 눈꽃으로 만발하다. 그 꽃은 높이 오를수록 연두색 얼음보석으로 변해 분위기를 돋운다. 아픔을 견뎌야 더 강해진다는 신념 때문에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에도 참고 견디는 나무에 경외감이 든다.
뛰는 토끼 위에는 나르는 새가 있다. 나보다 더 부지런한 누군가 발자국을 남긴다. 자국마다 사연이 깊게 담겨 있는 듯하다. 불자가 삼천 배 시 매 절마다 하심을 바라 듯, 한발 한발에 정성으로 희망을 모아 자국에 포갠다. 오늘 이 길에 나선 이들, 어떤 생각을 하며 자국을 남겼을까. 앞지르는 이 마주치는 이, 스치는 모두가 Happy New Year!
지난해는 행복하지 못했으니 올해는 행복하라고? 지난해는 행복했지만 오해도 변함없이 행복하라고? 행복한 지난해보다 더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어느 쪽인가. 아니면 모두다.행복이 무엇이기에 온종일 입에 달고 산행을 하는가. 이 질문에 어느 스님은 기분 좋은 것이 행복이라 답한 적이 있다. 만일 그 기분 좋음이 타인의 고통에서 온 것이 아니라면. 가파른 눈을 헤쳐 나갈 때 힘들어도 기분 좋다. 행복하다. 역시 이 행복이 타인에게 고통에서 온 것이 아니기를 빌면서. 진정 성공이 무엇인지 몰라도, 힘든 삶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정상에 섰다. 마치 약속한 듯 모두가 Happy New Year ! 현기증이 날 것 같은 파란 하늘 에는 산 고고니오, 하신토, 바덴 파웰 모두가 하얀 눈을 쓰고 구름 위로 우뚝우뚝 솟아 있고, 그 주위에 작은 산들이 납짝 업드려구름 바다 위에 둥실둥실 떠 있다. 그곳에는 어느 산쟁이가 와 있을까. 조각배라도 있으면 노를 저어 다가가 인사하고 싶다.
가슴에 웅크린 삶의 얼룩이 용수철처럼 튀어나와 가슴을 텅 비워낸다. 시원하다. 후련하다. 오래오래 머물러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다. 진한 에너지를 실은 세찬 바람이 얼굴을 스치면서 가슴에 쏟아 붇는다. 가슴 충만하다. 새해 첫날 여러번 정상에 섰지만 왠지 오늘은 감회가 많이 다르다. 늘 같은산 같은 하늘인데 마음이 변했나.
학명 선사(1867-1929 고종 시대)의 글을 떠올려 본다.
“묶은 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게
겨울이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 달라져 있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서 사네”
나도 모르게 카타리나 섬으로 눈길이 간다. 아내와 제 이의 인생이 시작하던 곳. 그너머 너머에는 내 고향이 구름 사이로 보이는 듯, 30년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마치 어제 일처럼. 그간 만나고 떠난 이들, 바람의 스침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훌훌 털며 히긋 돌아보면서 내려가는 인생 하향길, 촘촘히 짜인 하루하루를 겪다 보면 내일들은 얼마나 빠르게 지나갈까. 나눌 것들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거대한 자연 속에서는 모두는 작은 먼지이다. 바람이고 한 송이 눈이다. 그러니 다음은 대 자연에 맡기는 것이 현명하지 않은가.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고 문명이 아무리 자랑스럽다 해도, 스마트 폰이 세상을 바꾸어 놓았어도 그 역시 자연에 일부이다. 산을 찾을 때마다 스며드는 느낌이다. 산은 오르면 오를수록 말이 없어지고 극기야 나도 없어지지만, 세상으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말이 길어저 혼란스럽고 나도 꼿꼿해 진다. 그래도 하산해야한다. 정초라 애들이 온다기에.
하산 길은 여전히 깊은 눈, 햇살에 축축이 젖어 걷기에 편했다. 스키헡부터는 어느새 녹아 흙길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중천에서 쪼이는 해살은 눈꽃을 사정 없이 녹여 대지로 보낸다. 안개구름이 빈틈없이 계곡을 채우면서 냉기를 밀러올려 기온을 뚝 떨어뜨린다. 이미 서쪽으로 기운 해는 구름뒤에서 식어간다. 예년 어느 날과 다르지 않다. 그래도 첫날이어 일출은 못 보았어도 장대한 일몰을 기대했는데.
내일이면 여전히 나에게도 다시 따스한 햇볕이 비추리라. 이왕이면 삶의 방향을 틀어볼 강한 기운이 담긴 빛이 비추어 주었으면 좋겠다.
학명 선사의 말대로 우리 삶이 어리석지만, 신년 첫날 떠오르는 해는 가슴을 설레게 하니 내년에도 부르면 다시 흰 눈을 밟으며 찾아 오리라. 그땐 내 머리에도 흰 눈이 더 깊게 내리겠지.
“한 손에 가시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우탁(1263-1342 고려 원종)의 글귀에도 머리가 끄덕여진다.
비록 머리에 하얀 눈이 깊게 내리고 무릎이 새큰거려도, 눈이 침침하고 귀가 세밀한 소리에 멀어저도, 마음은 푸르고 청정하지 않는가. 그래 내 친구 마음아 이 우정 변치 말자. 그리고 푸른 하늘아 우리 서로 손 꼭 잡고 영원히 함께 하자구나.
Happy New Ye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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