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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동아시아의 패권을 말하다.: 201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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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초모랑마
댓글 0건 조회 439회 작성일 16-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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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입니다.


임진왜란과 동아시아의 패권을 말하다.


동아시아의 문명의 4개의 주춧 기둥,  대명제국과 조선, 그리고 일본(왜국)과 분열된 거대한 여진의 부족 연맹(후금/청)은 16세기 일본(왜)가 일으킨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격동의 파고를 넘나들기 시작하는 대 격변의 시기를 맞이한다.

지금까지 당시 동아시아의 임진왜란를 기술한 한국의 모든 역사서는 시대의 흐름 상황에 국한된 서사 기술만 반복 할뿐 복합적 이해득실을 따지려 하지 않는다.

조선 세종 대마도 정벌로 대마도주에게 관직을 하사하고 조선과의 무역을 허가하고 일본에 대한 모든 정보 루트는 이 대마도를 통해 전해듣게 된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자료가 부족했고 그냥 대마도 넘어 제법 큰 동서로 길게 늘어진 여러개의 큰섬 나라 정도로 밖에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

임진왜란은 침략을 시작한 일본이 물러간 전쟁이고 목적을 이루지 못한 일본이 진 전쟁으로 조선과 대명제국의 입장에서 씌여 졌고 승전의 역사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임진왜란에 대한 평가와 그들이 현재 인식하고 있는 당시의 결과에 대한 평가가 너무도 궁금했다.

그들은 임진왜란을 "분노쿠 에이노 에키" (분노쿠 년의 역)라고 기록하고 이것을 풀이하면 분노쿠 년에 일어난 반란 진압이라는 정도의 의미로 해석 될 수 있다.

"에키"라는 것은 민중 봉기, 또는 지방에서 일어난 영주의 반란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일본 입장에서도 임진왜란을  전쟁이 아닌 반란 정도의 역사 인식으로 기술하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세종 때 정벌 당한 대마도의 도주의 가짜 문서 조작 사건에서 비롯된다. 대마도주는 조선과 왜 국의 두곳에서 모두 관직과 녹봉을 받는 양다리 관계를 유지한 지역이고 두 곳의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곳이기 때문에 전쟁을 원치 않았다.

조선과의 외교 공식 통로였던 대마도주가  당시 실권자 "토요토미 히데요시"(풍신 수길)의 문서를 조작해서 조선에 전하고, 조선에서 받은 회답 문서를 조작해서 "히데요시 막부"에 전달한다.

일본 측 내용은  "대명제국을 치기위한 길을 열고 항복해라" 는 내용을 "가도입명" 명나라에 입조하게 길을 빌려달라는 내용으로 고친다. 그리고 조선 측의 내용은 "절대 불가" 를  "명과의 단교를 위한 구실을 찾고자 하니 기다려 달라" 는 식의 내용으로 변조하여 막부에 전달한다.

조선과 일본은 서로 변조된 문서 전달로 상황을 잘못 판단 한 것이다.

그리고 선봉대 역활을 맡은 대마도주의 부대는 부산에 안면이 있는 관리들과 먼저 조우 했을 것이다. 그리고 평소처럼 무역거래로 위장해서 포구로 상륙하고 무방비의 조선 군과 백성을 학살 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이 일본을 배신하고 먼저 공격해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거짓 보고 한다.

대마도에서 출정을 기다리던 일본군 본진은 그렇게 조선으로 진격해 들어 갔다.

일본측은 이런 문서의 내용으로 조선이 겁을 먹고 일본에게 항복 의사를 밝힌 것으로 판단하고 조선왕에게 조선 영토의 영주로 임명한다는 임명장까지 발부했고  조선을 자신들의 영지가 되었다고 판단 하게끔 조작한 사건으로 임진왜란은 시작 되었던 것이였다.


150년간의 전국 전쟁을 끝내고 모든 권력을 장악한 "히데요시"(풍신수길)는 매우 불안한 정권 유지를 이어 갈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킬수 밖에 없는 필연적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목표를 조선과 대명제국의 침공, 그리고 인도까지 점령한다는 허황된 계획을 발표하고 자신이 정복하고 항복한  토지의 영주들과 그 휘하의 무사 병력들을 조선침공의 선봉에 세우게 한다.

이것은 전쟁에 지더라도 정적이 될 수 있는 군사집단의 힘을 약화시킬수 있고 영토도 넓혀나가고 또 공적으로 영지를 하사 할수 있는 상도 줄수 있는 1석 3조의 큰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 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과 대명의 도자기 기술을 손에 넣고 싶어 했다.  

당시 일본 열도에서 서양과 교역하던 서쪽의 영주들은 일본에서 생산되는 은을 내어 주고 조총 무기를 전해 받았다.

그리고 서양의 무역 상인들은 이 은으로 "대명의 도자기와 조선의 자기를 구입하는 중계 무역을 한다.

당시 조선의 초량왜관을 통해 대마도와 교역하던 조선은 도자기를 일본에 수출하고 그 그 도자기를 서양이 구입하는 중계 무역을 통해 서양과 교역을 했는데, 이 도자기의 규모가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주는 알짜 사업이였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비싼 교역품은 "도자기" 였다. 명과 조선 이외에는 세라믹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을 가진 나라는 전 세계에 아무 곳도 없었다.

이런 도자기는 당시 최고의 상품이였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이 도자기 기술을 손에 넣어 직접 본국에서 생산해서  서양에 직접 팔면 그 몇 십배의 이익 발생 할 것이라는 계산과 그에 대한 복안이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최초의 일반백성이 최고의 권력을 잡은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그는 일본의 진정한 실력자 "오다 노부나가"에게 발탁된 "학쇼"(일반 농민) 출신의 용병 출신의  가장 밑바닥 계급이라 할수 있는 보잘 것 없는 신분에서 일본의 가장 높은 지위 계급인  "쇼군"을 넘어  "관백"이라는 지위까지 명목상 일본 왕인  덴노로 부터 임명 받고 모든 지배 조건과 통치 명분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일본의 전통 사회는  "덴노"의 왕계급과 조정의 공신 "공가" 계급과 지방의 영토와 관리를 하사받아 직접 통치를 하는 영주계급 "무가", 이렇게   3개의  계급이  역사적으로 일본을 지배하는 계급 계층이였다.

그중에서 무가 계급의 사무라이들은 철저하게  왕실과 공가 계급으로 부터 견제와 무시를 당했다.

그 무가 계급의  사무라이들도 혈연적으로 보면 왕실과 공가의 집안 사람들이다. 하지만 정해진 관직과 자리에서 밀려나 어쩔 수 없이 지방으로 밀려나야 했고, 그 힘이 약할 수록 더욱더 멀리 북쪽과 동쪽으로 이주 해야 했다.

이들 사무라이(무사) 계급들도 크게는 두개의 계급으로 나누어 진다.

무사 출신으로 말을 타는 "죠시"(상급무사)와 일반 보병 계급인 "카시"(하급무사)계급으로 나누어 철저한 계급에 맞는 봉록을 하사 받는 철저한 혈통에 의한 신분계급 사회였다.

하지만 점차 열도의 영토는 적고 이들의 자식들과 후손들은 늘어나고 도래인 같은 중국과 한반도에서 넘어온 재력있는 외래 귀족들까지 합세하면서 서서히 분열의 조짐은 시작되는 시기에 돌입한다.

결국 오닌의 난으로 시작된 이들  무사 계급의 영주 계급들은 자신들의 핏줄과 혼맥으로 이어진 친족 관계 끼리 죽고죽이는 암투가 시작된다. 이것이 전국시대의 전쟁의 시작이 되었다.

 이 시작된 전국 시대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싸울 수 있는 병력의 수를 채워야 하는 것이였다.

이미 발발한 전쟁에서 신분 계급과 혈통은 중요하지 않았다. 무조건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높은 계급으로 오를 수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농민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오랜 역사기간 동안 항상 피지배 계급이였던 농민들의 유일한 신분 상승 기회 였기 때문에 수 많은 농민들의 전쟁 참가가 이루어 졌다.  그 중에 한명이 "토요토미 히데요시" 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오다 노부나가" 라는 일본역사 최고의 영웅과 만나고 결국 그에게 발탁되어 "카시"(상급무사) 말타는 상위 계급의 사무라이가 된다.

전국시대의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 유명한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덴노로 부터 쇼군으로  추대한다는 교지만 받으면 "일본을 통치하는 대장군"  즉 "다이 쇼군"으로 명해지고 그 교지를 직접 받기 위해 수도인 "교토"로 직접 향했고 그  교토 근처의 "혼노지"라는 절에서 숙박을 하는 하루 동안  자신의 오른팔 가신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암살당한다.

이것이 일본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혼노지의 변" 이다.

이 사건은 현재의 일본인들도 말 못하는 비밀이 있다.

 이 사건이 있던 날 밤,  노부나가의 명을 받고 다른 영지로 출격한 "히데요시"(풍신수길)의 부대가 이곳에 나타나 "아케치 미츠히데"를  반란과 역모의 죄를 물어 체포하고 재판없이 바로 처형 했다는 점이다.

많은 일본의 사학자들은 교활한 "히데요시와 미츠히데"의 쿠데타, 주군 이였던 "오다 노부나가"의 사전 암살 계획에 의한 거사를 치루고 그 주범인 미츠히데를 토사구팽한 계략과 음모로 보는 학자들이 많이 존재한다.

나또한 히데요시와 미츠히데의 사전 교감이 있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증거는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고 아무 문서 기록도 없다.

이 사건을 계기로 "히데요시"는 단번에 전국 통일의 결과의 과일을 본인이 독차지 한다.

이런 음모의 소문은 다른 영지의 다이묘들도 다 전해 들었던  소문이지만, 워낙 "히데요시" 진영의 군세가 대단 했기에 누구하나 거론하는 자들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히데요시와 반 히데요시 진영의 전투가 벌어진다. "세키가하라 전투"라고 불려지는 동군과 서군으로 나눠지는 유명한 일본의 전쟁 역사 기록이다.  

이 전투에서 "히데요시"의 서군은 숫자의 불리함을 전술과 지략, 그리고 천운으로  물리친다.

이렇게 불안한 기반에서 만들어진 전국 통치는 다른 다이묘(영주)들을 휴식과 군사 정비 할 생각의 여유를 주면 안되는 것이였기에 그렇게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을 통해 대명을 공격한다는 허황된 계획을 급하게 세운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기고 나서 자신의 일본통치와 그리고 조선과 대명과의 전쟁을 사전에 준비했던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물론 전쟁 이전의 조선의 초량 왜관을 통한 첩보 활동으로 각종 군사 정보를 수집 했지만 조선의 기병과 보병만 제압하면 이기는 전쟁으로 판단했고 조선의 수군은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의 결과는 7년간의 동아시아 국제 전쟁으로 확대 되었고,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일본군은 7년간 점령하고 성까지 축조한 경상남도에서 물러나고 이 물러나는 왜적을 "명량 해전"에서 일부 격퇴한 이순신 장군은 그렇게 순국하는 결과로 끝났다.

하지만, 이 전쟁의 결과는 끝나지 않았다. 일본은 계획대로 조선의 30만  포로들을 일본 열도로 끌고 갔고 그중 수천명의 도자기 기술자들이 있었다.  

당시 조선의 총 인구가 5백만 정도라고 하니, 그 숫자는 실로 어마 어마한 숫자인 것이다.

그 후예들이 일본의 아리타 도기의 원조 "이삼평" , 그리고 몇명 더 유명한 일본 도자기의 신으로 추앙받는 조선에서 잡혀간 도공의 후예들이 아직도 일본에서 명성을 떨치며 도자기 기업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은 이 도자기 제조 기술로 엄청난 부를 축적해 나갔다.

그리고 230년간 일본역사 최대의 태평성대를 누리는 "도쿠가와 막부"  일본 최고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5대? 쇼군은  개띠에 태어나 개를 기르는 것을 좋아해서 "개장군" 이라는 별명까지 붙고 일반 백성도 못먹는 고기를  먹이고  전문 사육사 까지 두면서 개를 길렀는데 그 수가 자그만치 10만 마리가 넘었다고 한다.

조선은 전쟁이후 국력이 쇠퇴해졌고, 명 나라 또한 막대한 국력을 소비하고 북쪽의 분열된 거대 여진 부족이 이 기회를 살려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어 명나라를 정벌하는 전쟁을 준비하여 명나라를 무너 뜨렸다.

그후  조선을 섬기던 조공국에서 형제국으로 그리고  마침내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이후 조선은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섬기면서 철저한 내정간섭과 수많은 노예,공녀, 공물을 바치면서 간신히 국호만 연명한채 조선 후기 까지 이어져 왔다.

결국 도자기 제조기술로 부를 쌓고  국력을 더욱더 일으킨 일본은 서양의 기술과 세계 정세의 흐름을 잘 읽고  잠깐의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비교적 안정적인 근대화에 성공해서  다시 조선을 침략하여 한반도를 점령하고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그리고 그 이후의 역사는 너무나도 뼈아픈 한국의 근현대사 과정이다.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이 과연 조선이 승리한 전쟁이라고 당당하게 말 할 수 있는가...결과적으로 보면 조선과 명국이 전쟁에서 이기고 실리 싸움에서는 굴욕과 망국이라는 결과를 역사에 남겼다.

대명제국과 조선은 도자기의 독점 기술과 생산 설비로 막대한 수출 이익으로 부강한 국력을 이루며 동북아시아의 최강자 지위에 잠시 올랐지만, 임진왜란이후 일본에게 뺏긴 도공 기술자의 손실로 인한 막대한 손해는 가벼운 것이 아니였다.

명나라 또한 북방의 신흥 강자 후금의 여진에게 멸망 당하고 차이나 도자기 기술은 청 제국의 주요 수출 품목이 되어 유럽으로 비싼 가격에 팔려 나갔다.  

7년 전쟁의 조선반도에서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과 포로들은 전쟁이후 "도쿠가와 막부" 외교 재개 요구에도 돌려 받지도 되찾아 오지도 못했다.

형식적인 포로 수백명만 되돌려 받고 다시 일본과 국교를 맺게되고 일본의 요구에 의해 "조선 통신사" 라는 사절단을 보내는 데, 이것 또한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이 자신이 지배하는 영주들과 가신들에게  조선이 자신에게 조공을 받치러 오는 조공단이라고 거짖으로 전하고 조선(외국)의 조공단을 극진히 대접하라는 명을 각 지역에 전달한다.

만약 소홀히 대하거나 조공단의 사신이 불만을 제기하면 항명죄로 영지를 몰수하고 참수한다는 내용의 교지를 각 다이묘(영주)에게 내렸다.

 230년간 총 50번 정도  조선에서 파견되는 통신사를 맞이했다고 한다. 약 5년에 1번꼴로 300-400명의 통신사 일행을 조공하러 오는 조공단으로 맞이하면서 그렇게 극진한 대우와 최고의 음식과 향응을 제공 하면서 사절단의 묵는 숙소 마다 엄청난 환영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죽고나서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또한 철저히 자신의 일본 통치에 조선의 사절단을 철저히 정치도구로 이용한 것이다.

우리 교과서에는 일본이 조선의 문명을 숭상하고 왜국이  미개한 문명 컴플렉스가 있어서 그렇게 조선 통신사를 환대 했다. 고 하면서 최초의 한류가 조선통신사 라고 가르키고 있다.

세계에서 일본을 깔보고 업신여기는 유일한 민족이 한국인들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런 정치 이용 도구에 놀아난줄 모르는 역사 분석없는 왜곡의 교육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드라마의 거북선이 왜적의 배를 신나게 화포로 두들기고 그 화포에 날라 자빠지는 왜구들의 모습을 보면 속이 다 시원해 하고  이순신 장군의 "반포 하라" 는 우렁찬 명령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뻥 뚫리면서 일본에게 우월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라도 우리가 이겼노라고 자위하고 싶은것도 사실이다.

진정한 역사교육은 보여주고 싶은 것만 골라 보여주는 것이 참역사 교육이 아니다.

올바른 분석과 다양한 의견을 전달받고 보이는 역사를 보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라 생각한다.

이순신 장군은 군인으로써 정말 훌륭한 소임과 무한한 애국심을 보여 주었다. 정말 군인의 삶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라는 인류 역사 최고의 모범이 된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은 "명량"에서 죽음을 택하는 것보다, 비겁한 조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가치로 자신이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조선의 백성을 위한 새 나라를 만드는 선택을 했어야 했다.

물론 그러기에는 고령의 나이와 오랜 전쟁으로 약해진 몸과 기력으로 불가능한 일이였다고는 해도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순신 장군은 반드시 그렇게 했어야 했다.

요즘  다시 임진왜란이 드라마가 반영되고 있다. 최수종이 연기하는 이순신 드라마를 보면서 다시 한번 아쉬움 마음이 드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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