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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자형의 靈前에: 2015-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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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lbert
댓글 0건 조회 240회 작성일 15-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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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자형의 靈前에


● 금빛 消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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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Sutro Baths Upper Trail, Oct./20/2015 06:38 PM


“○ ○○ 나쁜놈 !” 이야기

  

    선친께서는 인천 학익동 사택집의 창문 창호지를 매년 새 한지로, 더럽혀지지 않은 장판도 격년으로 손수 바꾸셨습니다. 콩기름을 여러 번 입힌 장판지는 노오란 색으로 번쩍거렸습니다. 이 장판지가 맞닿는 곳엔 너비 5cm가량의 기다란 띠를 덧붙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띠가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곳에는 지름이 12cm정도의 원형의 장판지를 덧 씌우셨습니다. 직사각형 장판지를 입구부터 차례대로 펴나가게 되므로 방 안쪽 구석, 즉 벽과 맞닿는 곳엔 반쪽 원형이 놓이게 됩니다.

    저는 이 반쪽 원형과 벽이 맞닿는 구석에 손칼로 콩기름을 긁어 내고서 “○ ○○나쁜놈 !”이라고 빨간 색연필로 써 놓았습니다. ○ ○○는 자형 성함입니다. 신혼여행에서 바로 처갓집에 온 자형께서 이를 제일 먼저 발견하셨으나, 모른척하고 계시다가 아무도 없을 때 내게 “누나를 빼앗아간 내가 밉지?”하고 물으셨습니다.

  

   큰누님은 5남2녀의 막내인 제게는 단순히 누님이기보다는, 연세가 많으신 어머님의 사랑과는 또 다른 사랑을 내게 늘 주셨습니다. 열두 살 연상의 누님은 1·4후퇴 때 용산역에서 떠나는 군용열차 화물칸 안에서, 대구에 도착할 때까지 나를 품안아, 겨울철 살을 에이는 칼바람을 온몸으로 막아 주셨습니다. 제가 인천에서 국민학교 다닐 때 누님은 서울서 은행에 근무하고 계셨습니다.

    뜨개질로 목까지 올라오는 ‘도꾸리’세타를 손수 짜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책을 보자기에 싸서 등뒤 허리춤에 묶고 다니던 시절에, 저는 누님이 사주신 란도셀 책가방을 메고 다녔습니다. 설날 추석 등 명절이나 크리스마스가 가까이 오면 의례 ‘이번엔 내게 무얼 주실까’하고 은근히 누님 선물을 기다리고는 했습니다.

    그래서, 누님이 결혼한다는 사실은, 그 때 어린 제게는 지금의 느낌으로는 청천벽력으로 다가 왔습니다. 때문에, 제게서 누님을 빼앗아 가는 누군가가 그렇게도 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님이 제게 베풀어주신 사랑은 변함없어 누님이 결혼 후에도, 또 제가 이민을 떠나 올 때까지, 그리고 제 머리가 흰머리로 덮여진 지금까지도 여전하십니다.

  

   호수돈 여학교와 개성 중학(그 시절은 5년제)은, 개성 지역에서 남녀 학교의 명문교로, 살가운 사이였다고 합니다. 마치60년대의 ‘용산고와 수도여고는 친밀했다’는 듯이. 개성중학 출신의 자형이, 결혼하시기 전에 누님이 호수돈 여학교를 나왔다는 이야기를 누군가 (매파?)로부터 전해 듣고, 소공동 한국은행 본점 1층 창구에서 근무하고 있는 누님을 여러 번 찾아가 몰래 보고 오셨다고 합니다.

  

   자형께서는 과묵하신 성품이시어, 평소에는 늘 입을 굳게 닫고 계십니다. 말문을 열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소주를 권해 드리는 외길뿐입니다.

50여년 넘게 식사 때마다 반주를 빠뜨리지 않는, 진로소주(약한 도수가 나오기 전의 오리지널) 애호가이십니다. 얼음물에 탄 차가워진 소주가 서서히 펴지면 특유의 재치와 입담이 술술 나오게 됩니다. 한 번 말문이 열리면 좌중을 혼자서 끝까지 이끄셨습니다.

국내에서 널리 이름이 알려진 농약회사에서 65세까지 대표이사로 계셨고, 퇴직 후에는 등산모임에 참가하셔서, 한쪽 무릎에 관절염을 앓으시기 전까지는 국내 산하를 대부분 다 다녀오셨습니다.

    “배낭에 묵직한 돌을 넣고 다녀서 무리를 자초한 것 같다”고, 나중에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이 후에는 같은 연배의 술친구 분들과 정기적으로 맛집순례에 다니셨습니다.

  

    금년 8월, 팔순을 맞이하셔서 2남1녀와 손자손녀들로부터 산수연(傘壽宴)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뇌졸중을 당하셨습니다. 점심 때 맛집순례에 나가시는 길에서 증상을 느껴셨다고 합니다. 다행히, 곧바로 병원에 가셨고, 뇌출혈 아닌 뇌경색이어서 1주일간 머무시고 퇴원하셨습니다.

    작년 여름에 뵙고 왔을 때, 아침식사 때만 제외하고 점심에 작은 소주병(2홉?) 반 병, 저녁에는 한 병의 반주를 늘 즐기셨습니다. 그리고 기쁜 소식이나 주변에 좋은 일이나 별미의 안주가 생기면, 이를 위해서도 또 다른 반 병 정도의 소주가 필요했습니다. 퇴원 후에 ‘절대 금주령’을 받으셨고 아직까지 잘 준수하고 계신다고 하는데, 금단 후유증을 어떻게 극복하시는지 걱정이 됩니다.

    국제전화를 드리면, “잘 있고 괜찮다”고 짧막하게 말씀하십니다. 늘 함께 맛집순례를 다니시던 친구 분들과의 만남도 금주로 뜸해졌고, 새벽녘에 일산 호수공원 걷기도 “시늉만 낸다.”고 하십니다.

    이민 떠나오기 전, 가족모임에서 “5명의 처남이 있으나, 그래도 내 술잔을 비우고 돌려주는 막내가 최고다.” 고 농담하신 것이 엊그제 일처럼 떠오릅니다.

    세월은 화살처럼 삶을 밀어 낸다고, 새삼스레 느껴지는 요즈음입니다.(2008/10/30)


註 : 위의 글은 7년 전에, 자형께서 뇌경색을 앓으셨을 때, 저의 고교 홈페이지에 올렸던 拙文입니다.

  

   어제(10월28일)밤 늦게 자형께서 召天하셨다는 부음을 듣고, 졸문과 졸작의 사진을 영전에 올립니다. 금년 3월 위급하시다는 소식에 한 달 동안 뵙고 왔으나, 반년 만에 이승을 떠나셨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향년 87세. (2015/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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