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기, 시간의 동결 ㉕∼㉗: 201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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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기, 시간의 동결 ㉕∼㉗
인천공항 출국장에는 자그마한 책방이 있습니다. 널찍널찍한 규모에 화려하게 꾸며놓은 면세 점포 틈새에 자리해, ‘여기에도 책방이 있네, 무슨 새 책이 있을까?’ 호기심을 일으킵니다. 지난달 초에 돌아올 때, 그곳서 책이름《오늘은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입니다》(이 근후 지음, 2014/12/30, 샘터 펴냄) 을 구입해 태평양을 건너오며 읽었습니다.
정신과 의사였던 저자는 그의 책에서 네팔 사람들의 인생관을 토대로 사람의 한평생을 사계절로 나눠 서술했습니다. 힌두교의 영향을 그들은 사람의 수명을 100세로 설정하고, ①태어나서 25세까지가 봄 ②50세까지가 여름 ③75세까지가 가을 ④76세 이후는 겨울로 구분합니다. 여기서 봄은 청년이고, 여름은 장년으로 넘는 시기, 가을은 노년으로 넘는 시기, 겨울은 삶을 마감하는 인생의 종착역을 의미합니다.
이곳의 지금은 여름의 길목 입하立夏가 엊그제 지나, 이제 완연한 여름철의 시작인데, 나이 탓인지 저자의 가을-겨울 이야기가 무척 가깝게 다가옵니다.
● 고사목枯死木
――― Muri Woods National Monument, Feb./16/2015
아침햇살이 삼나무Redwood 숲을 헤치고 내려와 산숲 시냇가의 졸졸 흐르는 물에 율동을, 길섶에 푸르름을, 나무에 기지개를 안깁니다. 또 하루의 새날을 엽니다.
햇살은 살아있는 생명뿐만 아니라, 주검을 기다리는 죽음의 문턱에선 모든 목숨붙이에게도 나눠줍니다.
온 몸통을 이끼에게 더부살이 자리로 내준 나무가 왜 삶을 마감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푸르름이 무성했던 잎새는 희뿌연 쇠락衰落의 길을 밟고 있습니다.
진토塵土되어 부식토腐植土로 다시 태어나게 할 때까지 기다림인가 봅니다.
● 갈매기
―――S.F. City Fisherman's Wharf, Aquatic Park Pier, Feb./16/2015
오래되어 낡아 제 역할을 못하는 S.F. City Fisherman's Wharf의 서쪽 끝 부두pier는 낚시꾼과 갈매기의 쉼터로 전락轉落되었습니다. 검붉은 철근의 속살이 피 흘리며 떨어진 시멘트 사이로 내보입니다.
갈매기 한 마리가 나래를 접고, 옹벽 기둥 위에 보금자리인양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눈을 뜨고 있으나 카메라를 들이대도, 발자국을 옮겨 다가가는 시늉을 해도 요지부동입니다. 늙은 새 한 마리가 주위를 온통 적막寂寞에 휩싸이게 합니다.
후대後代 잇기를 끝내고, 짝을 먼저 보내고, 이제 삶을 내려놓으려고 마지막 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자화상自畵像
―――S.F. City Ocean Beach, Feb./18/2015
S.F.에 올라가서는 해질녘에 의례 해변을 찾아다닙니다. 지난 2월 중순에도 사흘째 해님이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계속된 바람이 먹구름을 불러온 탓입니다.
‘내일은 붉디붉은 황홀을 볼 수 있을 거야’ 스스로 읊조리며 위안 삼습니다. 눈길을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자, 핏빛 물듦 대신에 모래사장의 발자국이 무더기로 눈에 들어옵니다.
발자국은 ‘웬 욕심이 그리도 많으냐?’고 꾸짖습니다. 연이어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이제 늘그막에 허황된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여태껏 담아간 것들은 어떻게 할 거냐?’고 힐난합니다.
고종명考終命
사람의 얼굴은 그가 살아온 궤적을 내보이기에, 나이 든 늙은이의 얼굴에는 그의 한평생 삶이 응축凝縮되어 내보인다고 합니다. 주름살투성이에 검버섯이 만국지도를 그려져 후줄 출하기만 한 저의 얼굴은 변변치 못했던 삶의 바로미터barmeter입니다.
여태껏 뭐하나 남겨놓지 못하고 일흔 고개를 넘었기에, 늘그막의 아쉬움을 유독 사진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예전의 사진 파일을 들추면 스스로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설익은 느낌을 사진으로 담고 싶은 만용蠻勇에 허우적거렸을 뿐입니다.
앞서 인용한 네팔 사람들의 가을은 75세까지, 아직 5년의 시간이 남아 있음에도 독후감은 자책감에 젖게 합니다.
사람의 한평생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 고통의 이어짐이고,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목숨을 지닌 모든 생명체는 피할 수 없는 섭리입니다.
이 죽음을 맞이하는 내려놓기를 삼나무와 갈매기에서, 비록 사람이 아닌 식물과 동물에서 보았다고, 감히 주장하고 싶습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사람의 다섯 가지 복福의 하나로 고종명考終命이 있습니다. 주어진 명命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욕심을 내려놓아 마음을 비우라고 합니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자연의 이치를 겸허히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2015/05/08)
덧붙임 :《오늘은 … 젊은 날입니다》책은 은퇴한 팔순의 정신과 전문의가 50년 동안 진료하고 또한 30년간 해마다 네팔을 찾아 의료봉사를 해온 저자의 경륜이 페이지마다 담겨있습니다. 되짚어 읽을 때마다 긴 여운餘韻을 남겨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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