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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소나타 - Will to Peak (San Gorgonio): 2015-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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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 만 우
댓글 0건 조회 552회 작성일 15-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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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소나타 - Will to Peak (San Gorgonio) 

  

                                                                                                      

칠흑 같은 어둠 밤이 예상되는 날, 어제부터 몰아치는 강풍은 산 고고니오 산(11,502 ft)을 향한 프리웨이 주변 팜 추리를 아직도 뒤 흔들고 있고, 시야로 다가오는 하얏게 눈 덮인  정상은 내 가슴을 두들긴다.

 

 

'4 마일 이상은 위험합니다.' 정상 오버 나잇 허가를 주면서 레인저가 심심 당부한다. 따갑게 내리쪼이던 태양은 이제는 식어버린 채로 산등선에 걸터앉아 간간이 나뭇가지 사이로 연약한 빛줄기만을 보내고 있다. 붉게 물든 저녁, 노을이 짙어지기 시작하니 눈 위 발자국만이 정상으로 향하는 길임을 알려준다.

‘눈은 얼마나 깊을까, 바람은 견딜 만할까, 춥기는? 잠자리는?’ 하며 좀 의기소침하여 중얼거린다. 그러나 지난주 산 하신토 정상(10,834 ft)에서 황홀하게 해돋이를 맞던 기억이 스치면서 마음은 다시 평온해진다. 마침, 늦게 하산하는 이들이 있어, 정상 사정을 물어보았으나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우연한 부딪침이 새로운 느낌을 주지 않는가.’ 하며 계속 발길을 이어 갔다.

 

 

서너 시간쯤 걸었을까. 이제는 제법 어두워져 작은 머리 등만 의지해야 한다. 백 년 지기 소나무 사이사이에는 수북이 쌓인 눈이 머리 등에 반사되어 길을 더 밝혀 주고 있다. 나뭇가지를 뒤 흔드는 바람이 솔잎 사이를 스치는 쇳소리가 냉기를 더 느끼게 한다. 흉내 낼 수 없는 소리에 기분이 스산해지기도 한다. 기온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 코가 시큰할 정도로 냉기가 돈다. 그러나 힘겨운 걸음에 땀을 흘려 후덥지근한 차에, 가슴으로 속속 파고든 찬 공기가 몸 안 열기를 몰라내어 오히려 기분이 상쾌하게 해준다.

 

 

선택한 어둠의 세계, 오늘 밤 거센 바람과 눈을 헤쳐 나가면서 견디어야 할 새로운 세상이다. 어떤 느낌이 기다리고 있는지 궁금하다. 하현달 조각 배는 제 갈 길을 재촉하고 바람결에 춤추는 별들은 밤이 깊어 갈수록 더욱 반짝거린다. 머나먼 세계에서 몇 백 광년을 달려온 별들, 우주의 소식을 안고 눈가로 내려앉아 가슴이 문을 열기만 기다렸다. 말로 표현이 불가한 처음인 느낌, 간곡히 찾는 이에게만 보여 주는 귀한 선물이다. 

 

 

산허리를 감으며 두 시간 가량 깊은 눈길을 따라 오르니 캠프장이 있는 언덕에 이르렀다. 무릎까지 푹 빠진 어수선한 발자국이 갈 길을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다행이 팔을 벌린 안내판이 어렴풋이 갈 길을 안내한다. 다운타운 주변 도시들의 현란한 노란 불빛이 한눈에 들어온다. 분주했던 일상은 그 속에 잠겨 고요하다. 세상에서는 빛이 어둠처럼 강할수록 속 내용을 깊이 감추어 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진실을 외면한 체 현란한 겉모습에 끌려가기 쉽다. 이런 시간이 문득 후회스럽다. 쌓아온 어리석은 기억들이 별 바람 눈 속으로 하나둘 사라지면서 내면에서 솟는 황홀감에 젖는다. 하지만 배고프고 목이 마르고 피곤함을 느끼니, 역시 살아남아야 하는 한 개의 생물체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 했다.

 

 

바람을 피해 구석진 곳에 짐을 내려놓았다. 누룽지를 꺼내 뜨거운 숭늉을 만들어 보온병에 채웠다. 곱은 손을 비벼가며 먹는 누룽지는 값을 알 수 없는 생명의 성찬이다. 속옷을 하나 더 껴입고 윈 블럭과 바가리(얼굴 감싸개)로 더 무장했다. 다시 정상으로 나섰다. 눈길 발자국을 바람이 덮어 버려 길을 찾는데 잠시도 눈을 돌릴 수 없다. 무슨 인연을 맺으려 이리 야밤에 눈길을, 모질게 찬 바람 속 눈길을 걷는지 나 자신에 물어 보나 대답이 없다. 두툼한 옷을 파고드는 차가움, 귓전을 두드리는 쌩생거리는 바람 소리, 가슴으로 파고드는 별빛이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일지도 모른다.

 

 

삭풍을 뚫고 우뚝우뚝 솟은 봉우리들이 앞에 나타난다. 어느 것이 정상인지 잠시 두리번거린다. 여러 차례 등락인 덕에 정상 봉우리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감지된다. 팜 스프링, 엘에이 근교 도시 불빛이 노랗게 반짝이며 시야로 들어온다. 빅 베어 스키장 빛도 가세한다. 거북이가 사막을 건너듯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니 드디어 정상에 이르렀다. 시계는 새벽 3시를 향하고 있었다. 10시간 만이다. 거북이와 경주를 했어도 완패했을 것이다. 기대했던 돌무덤 잠자리는 눈이 수북하다. 바람은 더욱 거세고 사방이 눈이 깊어 몸 하나 감출 곳이 없다. 겨우 바람을 막아줄 바위 하나 찾아 그 앞에 눈을 다져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두툼한 우모 바지와 박하 잠바를 꺼내 몸을 감싸고 다시 비비쌕에 들어가 웅크리고 앉아 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포근한 느낌이 있어 졸음이 오기 시작한다. 움직이지 않으니 곧 찬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자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언뜻 든다. 텐트 안에서 잘 때는 안 공기가 완충 역할을 하기 때문에 추우면 잠이 깨어진다. 그러나 맴 몸인 상태에서 잠이 들면 체온이 갑작스레 내려가 심장이 멎을 수가 있다. 겨울에 조난당하면 얼어 죽는 이유이다. 잠을 자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지금 졸음이 쏟아져도 견디려 애쓰고 있다. 조금 지나면 날이 밝아 올 것이다. 비록 쪼그리고 앉아 불편했지만, 그 3시간은 30년 이상 지난 세월을 회상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드디어 동력이 볼그레 지면서 여명이 하늘 문을 열리 시작한다. 짐을 챙겨 다시 정상으로 향했다. 다시 정상이다. 저 아래 사막에 이어지는 벌거숭이 산등선이 아직 어둠 속에서 스카이라인으로 이어지고, 그 뒤에는 새날을 밝히려는 태양이 비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녘 하늘은 붉은색으로, 서녘에는 온통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다. 잠시 눈을 감고 그 빛이 싣고 오는 에너지를 두팔 벌려 온몸으로 받아드린다. 형언할 수 없는 이 느낌, 그래서 척박한 환경을 비집고 정상에서 잠을 청하나 보다. 묵묵히 해돋이를 맞고 있으니 황홀감과 고요 속으로 깊게 잠긴다. 다시 몸이 차가워진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눈길이니 6시간 이상은 족히 걸릴 것이다.

 

 

누구나 완벽하진 않아서, 어둠 속에서는 작은 빛도 희망이듯이 고통을 겪으며순간 아름다움이 힘이 되어 삶이 이어지고 있다. 인생은 희비애락으로 변화무상해도 이 사실만은 붙들고 싶다. 밝은 일상에서 반복은 감정이 무디어지나, 어두운 밤에 정상을 향한 한발의 움직임은, 진솔한 삶을 새롭게 풀어내는 감동의 시이며, 하늘이 노래하는 합주곡이며, 상상이 펼쳐내는 신비한 예술의 한마당이다. 순간순간이 얼마나 귀중하고 아름답고 행복한지 이에는 물음도 대답도 필요 없다. 삶이 오 분밖에 없는 사형수가 “일분만” 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헛되이 보냈다고 생각하는 시간 속에서 반짝 이는 작은 보석을 보았기 때문이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진심이고 선한 마음이고 아름다움이지.’ 고산에서 사투하며 중얼거리던 말을 오늘도 혼잣말로 이어간다. 왜 이런 체험에 몰입하는 것일까? 가슴은 보았을 것이다. 어둠속에의 초롱한 별들, 거센 바람, 바위마저 묻어 버린 수북한 눈, 수고스러운 땀, 차가움, 배고픔, 여명의 색상 등, 이들 속에서 행복이란 작은 보석이 반짝이는 모습을.

 

 

출발한 지 21시간 만에 주차장에 다시 도착했다. 배낭은 여전히 세상 무게로 묵직하다. “Peter Lee, Please call me when you get down.” 허가를 준 레인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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