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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은 약속 - Will to Peak ( Mt. Whitney)-1: 2015-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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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 만 우
댓글 0건 조회 523회 작성일 15-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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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은 약속-Will to Peak ( Mt. Whitney)-1

 

아직도 올라야 할 산이,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기다리지 않는 무심한 세월이 나를 서글프게 한다. 등에 실린 배낭의 짓누르는 무게가, 기력이 딸려 몰아쉬는 버거운 숨결이, 점점 굳어만 가는 풀지 못한 매듭이 또한 나를 서글프게 한다. 


미 대륙 꼭짓점에서 다가오는 느낌을 상상하면서 위트니 산 등정 길에 나섰다. 전에는 3월이면 많은 눈을 헤치며 힘겨운 산행을 했었는데 올해는 눈이 적어 예상보다 저녁에 조금 일찍 트레일 캠프장에 도착했다. 호수는 꽁꽁 얼어 있었으며 캠프장과 오르려는 직벽 계곡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등정 허가를 주면서  마지막 캠프장부터는 정상적인 루트로  오른 이가 아무도 없으니 조심하라는 레인저의 말에 설마 했는데, 정말 캠프장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해가 뉘엿뉘엿 능선을 넘어가니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추운 기운이 엄습해 온다. 역시 고산 날씨는 자신만이 안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바람을 조금이라도 피해보려 바위 옆에 눈을 파고 잠자리를 폈다. 피곤해도 고도가 12,000ft쯤 되니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비몽사몽 간에 잠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 녁, 강한 찬바람이 단단히 묶은 텐트를 날릴 정도로 뒤흔들어 깨어 보니 3시, 예정대로라면 서둘러 산행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마음이 동요된다. 아무도 오른 이가 없다는 말이 신경 쓰인다. “돌아섭시다.” 동행한 친구가 우려의 표정으로 말을 건넨다. 날이 밝기 시작하면서 바람은 조금씩 잔잔해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졌다. 정상으로 향하는 이들의 모습도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기대가 컸던 산행인데 중도에 하산하다니 ‘이제라도 정상으로 향할까?’ 했으나, 귀가 시간이 늦을 것 같고 아마도 산이 뜻이 있어 우리에게는 아직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아 서운하지만 하산하기로 했다. 안전을 위하여 잘한 결정이라고 위안하며 다음을 약속했다.


철수하다니! 돌아와서 생각하니 도무지 궁금증이 가시지를 않는다. 다시 갈 마음으로 짐을 챙기고 있는데, 내 안 Yes와 No가 서로 다투고 있었다.


“안 돼 나이를 생각해라.” “그래 내 나이가 어때서?”


“아직도 거기는 생 겨울이야.” “나는 생 겨울이라서 간다.”


“그래 가자!” 결국, 나는 Yes에 손을 들어주었다.


주말 이른 아침, 별 비를 맞으며 다시 집을 나섰다. 어둠 속 적막을 뚫고 고요를 질주하는 즐거움은 산쟁이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차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멜로디와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 향도 흥에 가세한다. 팜데일 언덕에 올라섰다. 검붉은 여명에 감싸여 호의를 받으며 태양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매일 지켜보지만 일출 장면은 장소와 날씨에 따라서 색다르게 나타난다. 나서기를 잘했다고 자찬해본다. 잠시 내려 신비스러움에 취해 있었다.


레드 록 지역을 지나 다시 언덕에 울라 섰다. 끝이 아득한 드넓은 사막 들판에는 노란색 Desert Dandelion (민들레 과)꽃이 고속도로 양변에 만발하다 지난주에도 지나쳤는데 아마도 지금이 절정인 듯싶었다. 차를 세우고 꽃밭을 조심스럽게 걸어보았다. 거의 일 년 내내 강한 햇빛과 메마른 목마름을 견디고 어느 봄날 가냘픈 꽃을 피우는 집요함에 놀랐다. 작은 꽃들이 집단을 이루니 강인함도 엿볼 수 있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이 꽃에도 해당하는 것 같다. ‘하나면 가냘프게 어여쁘고, 뭉치면 강하게 아름답다.’라고 편집해본다. 어서 오란 듯 활짝 웃으며 반긴다. 이어지는 꽃밭을 가르며 롱 파인까지 가는 동안 사막에 대한 내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사막 하면 모래, 선인장, 메마름, 억센 잡풀들 등 이미지였는데 이제는 녹색 세상과 또 다른 생태계임을 알게 되었다.


관리사무소 직원에게 트레일 캠프에서 혼자 이틀 잔다고 신고했다. 장비를 조목조목 확인 후 일요일 밤에 눈이 내리니 될 수 있으면 하산하라고 당부한다. 텐트 없이 자려 했는데 의아해서 하늘을 보니 맑고 쾌청하여 감이 오지 않는다. 등산 진입로에 도착했다. 얄팍한 경험을 살려 무게를 최대한 줄였는데도 첫걸음부터 묵직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고산 등반에서는 언제나 그랬듯이 무사히 잘 견디고 돌아왔다.  출발지점 8,340ft에서 정상 14,496ft를 향하여 6,156ft를 22마일을 오르내리는 일에 무엇이 나를 부르는지 고산을 오를 때마다 자신에게 묻지만, 아직 답이 없다. 그렇지만 그런 우려 속에서도 잘 마치고 이렇게 오늘도 반복하고 있다. 지난주보다 눈이 많이 녹아 걷기가 수월하다. 트레일 캠프장에는 꽁꽁 얼어 물이 없어서 입구에서 4.5마일 지점 Mirror Lake에서 빈 병에 물을 채웠더니 짐이 더 묵직해진다. 눈을 밟는 한 걸음 한걸음이 캠프장까지 이어졌다.


해는 이미 Crest Ridge 능선을 넘고 있고, 그러면서 바람이 서서히 일기 시작 한다. 바람을 피해 바위틈에 비비쌕을 펼쳐 몸을 숨기고 바람결에 날리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새벽 3시쯤 일어나 준비를 서둘렀다. 캠프장에는 나 혼자인 것 같았다. 차가운 날씨에 떡라면 끓는 소리가 정겹고 냄새가 군침을 돌게 한다. 여기에 날달걀 두 개를 풀어 넣은 맛, 어느 진수성찬과 비교할 수 있으랴. 쭈뼛했던 그믐달마저 자리를 감춘 칠흑 같은 새벽, 멀리서 불빛 하나가 반짝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 빛을 따라갈 생각으로 서둘러 잠자리를 둘둘 말고 짐을 챙겨 바위틈에 끼어 놓았다. 그리고 어서 앞서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Good Morning 새벽 인사가 정적을 깨운다. 건장한 20대 청년, 물이 있는 포스트 캠프장에서 올라오는 중이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금시 보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헤드램프에 의지하여 하얀 발자국을 따라 나섰다. 한 시간쯤 올랐을까 이상하여 살피니 다른 계곡으로 가고 있었다. 지쳐 있어 실망했어도 자주 등락인 터이라 곧 알아차려 Crest Ridge 능선으로 향하는 발자국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무리 서둘러도 방향이나 목표를 잘못 설정하면 헛수고에 그치는구나,


‘눈 덮인 들판을 걸을 때 / 함부로 걷지 말라 / 오늘 걷는 발자국은 / 뒤 오는 이에 이정표가 될지니.’ 서산대사의 '답설'이라는 시 한 수 읊조려 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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