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에 다른 주인들: 2013-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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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다른 주인들
친구 따라 사진 예술 강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사진이 기계조작이지 무슨 예술이냐고 고집하던 나로서는 어려운 걸음이었다.
70세도 넘었다는 연사는 머리는 백발인데 서있는 자태는 젊은이 못지않게 기백이 역역 했다. 평화로운 풍경, 순한 눈망울을 가진 동물, 형형색색의 크고 작은 새, 많은 사연을 안고 있을 법한 도시의 뒷골목, 그리고 현대적 감각이 물씬 풍기는 빌딩 등 피사체를 구도와 명암 등의 이론을 대입하여 설명해주었다. 사진에 대하여 무지한 나도 ‘아 그렇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연사의 얼굴에는 진지함에서 오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은퇴한 상태이라 경제적 여유롭지 못한 속에서 절약하여 고가의 장비를 마련하고, 많은 시간을 혼신으로 사진에 집중하며 노후 지내는 보습이 아름다워 보였고 부럽기까지 했다.
가는 곳마다 눈길을 끄는 액자가 걸려있는 것이 오늘 연사가 일깨워준 사진이 주는 느낌 때문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감동적인 끌림 때문에 사진을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사진작가는 사진기라는 기계의 도움을 받아 그 끌림을 사진에 담으려 한다. 생각해 보면 미술도 물감이나 붓이라는 도구의 도움으로, 음악은 악기나 성대의 힘을 빌려 오감에서 얻어지는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나도 이제 사회에서 조금씩 변두리로 물러서니 마음이 조금 여유로워진다. 그간 틀에 박힌 삶에 싸여 옹크리고 있던 감성의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는 것 같다. 눈으로만 보았던 세상이 마음으로 보니 더 넓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살아오면서 미련을 가졌던 일들을 챙겨보려 여기저기 기웃해본다. 그러나 자신이 없고 마음만 부산하다. 그렇지만 '천 번의 생각, 백 마디의 말보다 한 걸음 내디딤만 못하고 늙은 삼십 대와 젊은 칠십 대'라는 말도 있으니 한번 적극 시도해보고 싶다.
일전에 발디산 정상에서 밤을 지낸 적이 있다. 늦게 도착해서 바람만 피하려 바위 옆에 침낭을 펴고 잠을 청했다. 이른 새벽 부스럭하는 소리에 깨어보니 두 청년이 내 옆에서 차가운 손을 비벼가며 복잡한 사진 장비를 설치하고 있었다. 샌디에고에서 해돋이 촬영을 위해 자정에 출발하여 지금 도착했다는 것이다. 장렬한 일출 장면을 어떻게 사진에 담을까 긍금하여 차가운 몸을 일으켜서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먼동이 트기 시작하니 태양이 서서히 솟으며 검붉은 색을 쏟아내어 주위를 연붉은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사진사의 손놀림이 카메라에서 바빠진다. 문인은 이 느낌을 시로, 수필 속에 어떻게 표현할까. 음악인은? 화가는? 슬며시 궁금해진다.
나는 때때로 등산인으로 정상에 서곤 한다. 하지만 그곳에는 등산인뿐만 아니라 글 쓰는 이, 사진작가, 화가 그리고 음악인도 있음을 이제 알았다. 그러고 보니 이들 모두가 주인이다. 이른 아침 사진기 삼각대를 바쳐놓고 해돋이를 기다리는, 때로는 캠퍼스를 펼쳐놓고 스케치하는, 틈틈이 하모니카를 부는, 그리고 달빛 아래 시를 쓰는 정상의 또 다른 주인을 상상해 본다. 그 주인이 바로 나이기를 바라며.
그간 사진은 예술이 아니라 기계조작이라는 무지에 나 자신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살아오면서 부딪친 느낌을 진지하게 사진에 담아 놓았더라면 삶의 흔적을 생생하게 회상할 수 있을 터인데”하는 아쉬움이 앞선다. “지금부터라도 세심하게 챙겨야지” 하며 다짐을 해 본다.
쓴이 : 이 만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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