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산쟁이와의 단상: 202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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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산쟁이와의 단상
히말라야산에는 사람의 발이 닫지 않은 고봉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최초인 산쟁이가 되고픈 이들이 매년 줄 이어 등정을 시도하고 있다. 올해 79세인 빌 버크라는 지인도 그 중 하나이다. 2015년 미국인으로서는 72세 최고령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그는 다음 해 다시 그중 하나를 최초로 정상에 섰다. 그 후에도 연이어 이메일에 “I'll be back"이라는 끝말을 남기고 시도했으나 그 성과는 록록치 않다. 그 메시지는 볼 때마다 ”무엇이? 나는?“에 대답에 몰두하곤 했다. 그의 기록도 작년 75세인 은퇴 변호사 아서 뮤어에 의해 지워젔다. 기록에게는 짧은 박수만 있을 뿐 늘 새것을 기다리는 냉정함이 있다.
7년 전 그가 연사인 산악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네 번째 만남이다. 익숙해지려 낡아 버린 장비를 미리 손수 진열하고, 세미나를 마친 후 가방에 다시 챙기는 모습에서 산악인의 고난의 긴 여정이 엿보였다. 장비를 챙기는 일에는 누구의 도움도 사양한다. 아마도 생명을 지켜주는 장비 하나하나가 몸 일부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와 첫 만남은 에베레스트산에서였다. 그의 세 번째 등정시도 끝에 당시 미국인 고령 등정기록인 64세를 빌이 나이 67세에 밀어 냈다. 다음해 그 다음에 연이어 티베트 루트를 두번 시도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내가 참석한 세미나를 마치고 다음날 그는 72세인 나이에 티베트로 향했다. 네팔 쿰부 루트(남)와 중국 티베트 루트(북)를 동시 등정한 산악인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잘 다녀와 빌.” 여섯 번째 (2015년) 초모룽마(에베레스트 산의 티베트어)를 향하는 손을 꽉 잡으며 마주한 얼굴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을 서로에게 전한다. 그는 산행을 마친 후에는 글, 사진, 동영상으로 말끔하게 마무리한다. 동영상에서 보여준 손을 흔드는 모습은 의지, 역경, 성취의 감동적 표현이다. 그에게는 지체장애인 손자가 있다. 빌은 산행에서 생사의 어려움을 마주칠 때마다 “내 귀여운 손자는 지금까지 어려운 삶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이쯤이야.” 하며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고 한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의 삶에서 우러나는 애정과 열정이 감동을 넘어, 온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살아오면서 찾아온 한번 해볼 만한 가치 있는 것들, 머뭇거리다 기회를 놓쳐버린 일들에 후회한 적이 한두 번인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하고 자신에게 묻고 물어보니 답이 없어 답답함을 금할 길 없었다. 에베레스트 등정은 상식선에서는 무모하기 짝이없는 시도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큰소리치지만, 최상의 전문인도 자연의 거대한 위력 앞에서는 힘없이 무너진다. 에베레스트산 등정에서는 열 중 서넛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도 이러한 사고를 목격한 적이 있다. 빌은 자연에 순종할 줄 아는 지혜를 갖고 있어 안전하리라 믿는다. 과연 그답게 72세 나이에 다시 정상에 올라, 자기 기록을 경신하고, 남북 루트를 동시에 오른 유일한 미국인이 되었다.
지나고 보니 진솔한 삶조차도 꿈속에서 허우적거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꿈 큰 꿈, 이룰 수 있는 꿈 이룰 수 없는 꿈속에서. 이 표류 속에서 그나마 지켜준 것은 산이 아닌가 싶다. 산은 내 삶에서 무언의 이정표이고 나침판이었고 때로는 허심탄한 친구였다. 이런 연유로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거대산맥의 최고 봉우리를 서는 것이 나의 꿈이 되었다. 히말라야에 에베레스트산(8,848m, 2009 등반), 남미 앤디 산맥의 와스가란산(6,768m, 칠레, 2007 등정), 알래스카의 데날리(6,190m, 구 메켄리, 2006 등반)에 기웃거렸다. 성공하면 그럴듯한 괴짜로, 못하면 미치광이 취급받지만, 덮어버리기에는 아쉬움이 너무 커 퇴색되어가는 바람 속에서도 이것만은 꼭 이루고 싶은 꿈이었다. 지금도 낮은 산이건 높은 산이건 하얗게 눈 덮인 정상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일전에 에베레스트 산 등반시 정상을 목전에 두고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섰다. 내년에 다시 하며 굳게 약속했지만, 그 후 아쉬움만이 가슴에 서성 인체로 12년, 그간 생각의 응어리는 아마 100년치도 넘을 것이다. 마음을 달래려 침상 머리에 고산 등정기를 놓고 잠들기 전 몇 장씩 읽곤 했다. 그때마다 몇 줄 못 가서 성급한 마음이 설산으로 달려가 가슴이 뛰기 시작하여 책을 덮고 등정을 그리며 잠이 들곤 했다. 그간 다시 시도하려 일부 장비도 새로 마련했다. 그러나 훈련 중 허리 통증으로 6개월, 자전거 사고로 또 6개월을 보내어 계획이 어긋났다. ‘내년에 다시’하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지만 거울에 비친 얼굴이 왠지 낯설기만 하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빌의 산행 소식이 날라 올 때 마다 내 마음이 모아지고 시선을 끈다. 산행 중 전해주는 그의 소식은 식어가는 정상을 향한 열정에 불을 지펴 새벽길을 뛰게 하고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게하고 세차게 물을 가르게 한다. 언젠가는 빌이 불쑥 나타나 산행에서 만난 신령스러운 느낌을 가득 안고 묵직한 다래를 잔잔히 풀어낼 것만 같다. 그의 건강한 모습이 눈에 선하여 보고 싶어진다. 연이어 멋진 등정을 마치고 ‘I'll be back'이란 말을 다시 들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여명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껴안으며 길이 먼 버거운 희망의 날갯짓에 힘을 모아본다.
해마다 덩그렁 한 장 남은 달력에 비춘 저녁노을이 예사롭지가 않다. 바다 저 너머로 잠기는 검붉은 태양을 보고 있노라면, 해를 거듭하는 초조함속에 그때 이야기가 가슴에서 꿈틀거린다. 한 해의 끝이 끝말이 아닌, 다시 시작하라는 당부로도 다가오지만 삶의 고갯길을 넘어 아래로 치닫는 느낌은 떨질 수 없다. 메마른 글을 다시 새기는 것이 송구스럽다. 혹시나 접하는 이의 가슴을 달구어 'Yes, I Can '하며 마음을 다지는 글이었으면 한다. 나 자신과 약속을 한지 12년이 지났다. 방 한구석에 쌓인 장비를 마무작거리면 말이 끈킨다. 허리가 아프고 손이 저려온다는 핑계로 약속 한해 한해 미루워 왔습니다. "Yes You can!" 하는 외침이 이젠 메아리로만 다가온다. 아직도 산행을 이어간다며 이메일을 통해 소식을 주는, 80을 바라보는 빌버크에 부러운 마음으로 건강과 행복을 빈다.
가끔 지인들이 고생을 무름 쓰고, 때로는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고산을 오르려는 연유를 묻곤 한다. 대답이 난감하다. 세상 잣대로는 설명이 불가한 영역이다. 모차르트의 레퀴엠 선율이 가슴을 파고 들때 , 레오나도 다빈치가 다소점 원근법으로 그려낸 모나리자의 눈빛을 어떻게 설명이 가능한가? 해본 자만이, 들은 자만이, 눈길을 받아본 자만이 가슴에 답을 안고 있다. 굳이 답을 짜내면 삶의 패러다임이 달라진다고 답하고 싶다. 그간, 당연시 했던 것들, 공기 물 한모금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어께를 짓누루며 괴롭혔던 생각들이 한조각 한조각 부서지면서 얼마나 사소했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온기가 빠진 내용을 새삼 다시 올리는 이유는 새로 입문하는 산쟁이들에게 불쏘시개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다. 제목만 스쳐도 좋고, 끝까지 읽어주었으면 더욱더 고마울 따름이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그래”하며 주먹을 한번 불끈 쥐어 보았다면 나로서는 대박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굳게 믿고 싶어진다. 기억하자 올해 빌은 79세 아서는 76세인 것을.
세계적인 산악인 라인 홀트에게 히말라야 12좌를 최초로 오른 후 기자들이 묻는다. 정상에 선 느낌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냐고?” 그는 대답한다 “제기랄! 감동은 무슨 감동 어떻게 하면 살아 내려갈 것인가 하는 두려움에 휩싸인다고.” 꿈은 이루면 이미 꿈이 아니다. 그러나 그 꿈으로 향하는 여정은 정상보다 더 값지다. 그 여정의 길이는 오년 십년이 될지도 모른다. 모두의 오늘 산행이 에베레레스트 정상을 향하는, 진정 자기를 발견하는 발길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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