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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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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lbert
댓글 0건 조회 507회 작성일 12-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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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 모자

     

   요즈음 여태껏 하지 않던 짓거리를 합니다. 베레(beret) 모자를 쓰고 거울 앞에 서서, 낯설게 보이는 얼굴을 하염없이 쳐다봅니다. 두꺼워진 눈두덩 위 풀어진 동자(瞳子)가 “너는 누구냐?”고 힐난(詰難)하듯 묻습니다. 뭐라고 답해야할지 몰라 당혹스러워 그냥 쳐다보다가 제풀에 지쳐 끝냅니다.

    사나흘 되풀이 하자, 답은 의외로 쉽게 풀리고 당혹도 자연스레 가십니다. 거울에 비춰진, 본래 모습의 ‘나’로 받아들이자 답은 자명(自明)해집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나이 들고 나이 듦에 따른 노화(老化)를 처음에는 아니라고 부인하려 했으나, 이는 부질없음을 깨닫고 받아들이자 비로소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베레 모자 창 아래서 번뜩여야 할 날카로운 눈매는 간곳이 없고 노추(老醜)의 풀어짐만이 남았기에 명탐정 셜록 홈스의 연상(聯想)은 덧없이 스러집니다.

  

   뉴욕 맨해튼 34가와 브로드웨이가 만나는 근처에 전 세계의 유명한 제품을 고루 갖춘 모자(帽子) 전문집이 자리했습니다. 30년 전에 장인어른께서 뉴욕에 다니려 오셨을 때 그곳에 모시고 갔습니다. 수많은 모자들을 디자인별로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고 그리고 거울 앞에서 써 보기를 반복하길 무려 세 시간을 넘겨 모자 두 개를 고르셨습니다.

    그때,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1백80 여분의 멈춤은 엉뚱하게 ‘왜 나이가 들면 모자를 써야 되는가?’ 하는 의문으로 이어졌고, 그리고도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아니 했습니다.

    강산(江山)이 세 번이나 바뀌는 세월이 흘러간 이제, 뒤통수에 찬바람을 맞고서야 ‘뒤늦게 철’이 듭니다. 아직 머리숱이 앞과 옆, 뒤에는 그렁저렁 달려있지만, 정수리 뒤에서 아래쪽으로는 윤기만 반들반들 흐릅니다. 역삼각형의 불모지(不毛地)는 점차 영역을 옆과 아래로 넓힙니다.

    아이들의 외사촌 한 명이 San Diego에 있는, 꽤 알려진 회사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지난 달 그가 디자인해서 상품화된 금년 겨울철 모자를 보내주었습니다. 날씨가 추워진 요즈음 모직(毛織) 모자에 부쩍 손이 갑니다. 밖으로 나가가기 전에 거울을 마주보고 서서 디자인과 색깔이 각각 다른 세 개를 번갈아 써보고 하나를 고릅니다. 마치 통과의례(通過儀禮)를 치르듯이. 이 잠깐 동안의, 혼자만의 여유(餘裕)를 즐김도 제법 쏠쏠합니다.

  

   베레 모자를 쓰고 ‘자전거 길’에 걸으러 나섭니다. 동트기 전 새벽녘은 일주일 넘게 계속되는 부슬비가 흩뿌려 어깨를 움츠려들게 합니다. 촉촉한 아침 이슬비를 머금은 양털의 감촉이 한결 부드럽고, 민둥머리는 한결 따사롭습니다.

    두 손을 뒤로 돌려 맞잡고 발걸음을 희뿌옇게 밝아오는 동녘으로 내딛습니다. 가형(家兄)의 수필에서 알게 된, 노후(老後)의 선친(先親) 모습을 떠 올립니다.

《선친은 늘 뒷짐을 지셨다. 뜨락으로 나설 때엔 뒷짐을 즐기셨다. 뒤로 돌린 두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추녀 끝 툇돌에 올라서 돌담 밖을 멀리 내다볼 때에도 뒷짐의 자세였다. 나이가 들면 균형을 잡으면서 허리를 펴는데 뒷짐이 아주 편한 것을 나도 요즘 알게 된다.—‘추녀 끝’ 첫 구절》

    뒷짐을 지고 걷자 어깨가 똑바로 펴지고 고개는 곧게 세워집니다. 발끝 언저리에 머물던 눈길은 저절로 멀리 앞을 내다봅니다. 멀고 가깝게 다가오는 하늘 열림에 따라 생각의 너비도 늘어나고 또 두터워진 듯싶습니다. 이제부터 선친의 뒷짐을 ‘내 뒷짐’으로 지니자고 다짐합니다.

  

   벌써 12월 초순입니다. 흑룡(黑龍)의 해도 곧 저뭅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늘 찾아오는, 그것도 느낌의 강도(强度)가 점차 세지는, “세월은 참으로 빨리도 흐른다.”는 탄식(歎息)에 잠기게 하는 요즈음입니다.

    늘 옆에 두고 마음 내키는 대로 집어서 읽는,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로 이름 붙인 책이 있습니다. 책방에서 처음 보고, 얄팍한 상술(商術)을 내건 책안에 무엇인들 담겨있으랴 싶어 지나칩니다. 하지만, 제목이 꼬드기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다시 돌아가 펴듭니다. 한번 읽고 마는 단순한 읽을거리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문화 심리학자 김 정운의 강론을 묶은 책입니다. 지은이 특유의 필치(筆致)가 저절로 고개를 끄떡이게, 빙그레 웃게, 무릎을 치게 하며 그의 주장에 승복하게 만듭니다.

    천천히 음미(吟味)하며 깊게 되새김질하게 합니다. 서술 하나를 요약합니다.

《‘하루의 삶의 속도〓1/나이’…열 살 먹은 아이의 하루는 1/10 이다. 오십 살 먹은 사람의 하루는 1/50 이다.…나이가 들수록 삶의 속도가 빨라지는 이유를 심리학자들은 ‘회상 효과’로 설명한다.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내용이 많으면 그 삶의 시기를 길게 느끼고, 기억할 수 있는 내용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시기는 짧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2012/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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