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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길 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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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lbert
댓글 0건 조회 491회 작성일 12-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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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길 斷想

     

   먼동이 트기 전의 하늘은 희뿌연 잿빛으로 가득합니다. 불 밝힌 가로등과 질주하는 자동차의 앞과 뒤의 엇갈린 불빛이 Route 66(America's Main Streets)에 기다란 수(繡)를 놓습니다. 이 길 위에 나지막한 산등성이가 있고 거기엔 널찍널찍한 살림집들이 있습니다. 이 살림집과 자동차 길 사이에 자전거 길(BIKE route)이 동서로 뚫려있습니다.

    도심(都心) 한가운데 자리한 자전거 길에서, 장닭을 만남은 전혀 뜻밖입니다. 여섯인가 일곱 살 꼬맹이 때의 아련한 기억을 일깨워준, 홰치는 목숨붙이를 만난 기쁨은 왜인지 모를 설렘을 안겨줍니다.

 

검붉은 벼슬 장닭

희뿌연 동녘 하늘

꼬끼오~ 꼬끼오 ~ 꼬끼오

  

   세 홰 울어 여명(黎明)을 엽니다. 횃대가 아닌 나무 울타리 위에서일지라도 그리고 비실비실 거리는 늙은 암탉을 거느릴지언정, 홰치는 수컷의 위엄(威嚴)은 새벽녘 하늘로 치올리는, 존재(存在)의 확인입니다. 수컷의 의연(依然)에 한참 동안 못 박혀 서 있습니다. 붙잡혔던 두 발을 떼어내 걷자 곧바로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들이 듭니다. 하여, 혹시 장닭의 홰침은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스스로 되묻습니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의심을 떨쳐냅니다. 그래도 머릿속은 뒤엉킵니다. 미몽(迷夢)에서 벗어나려 발걸음을 앞으로 성큼 내딛습니다. 홀로 걸으며 스스로 묻는 ‘생각’은 내적 언어(inner speech)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내 이야기이기에 순수합니다.

  

   이제 곧 11월, 늦가을도 끝나가고 곧이어 겨울이 다가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의 바뀜과 소년, 청년, 장년, 노년의 사람 한평생은 얼추 비슷하다는, 글을 얼마 전에 읽었습니다. 봄의 소년은 사춘기(思春期)를 거치고, 이에 버금가는 가을 장년에는 사추기(思秋期)를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사춘기의 특징이 반항이라면 사추기에는 우울을 꼽습니다.

    내일 모래 일흔의 문턱을 넘겨보고 있습니다. 겨울, 오래 전에 노년에 이르렀음이 확실합니다. 여태껏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습니다. 구태여 남겨진 것을 찾으면, 흰머리와 검버섯의 겉모습 그리고 허송세월을 보낸 삶의 허무와 좌절의 회한(悔恨)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장년기 이야기를 꺼낸 솔직한 속내는, 세월을 되돌리고 싶은 탐욕의 마음보 탓이겠습니다.

  

   연분홍 햇살 여울이 동남쪽 San Gorgonio 산 너머부터 서서히 떠오릅니다. 우거(寓居)를 나선지 족히 한 시간이 넘습니다. 온 길로 되돌아섭니다. 반역광(逆光, Rembrandt Light)의 햇살이 길가의 나무들에게 내립니다. 간밤의 후줄근을 벗은 나뭇잎이 싱그러움을 내뿜습니다. 자양분을 듬뿍 받은 나뭇가지는 속살을 활짝 내보여 생기발랄(生氣潑剌)합니다.

    해님이 솟습니다. 새삼스레, “걷기에는 내 생각들에 활력과 생기를 부여하는 그 무엇이 있다(장 자크 루소).”는 구절을 되뇝니다. 절로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옆으로 빗겨 내린 햇살이 키 작은 훌쭉이를 팔척장신(八尺長身)으로 키워줍니다.

    시선은 땅위에 옆으로 길게 드리워진 분신(分身)을 좇고, 발걸음은 그저 앞으로 내딛습니다. 아무런 생각이 자리할 틈도 없습니다. 이는 잠시뿐, 그림자 앞에 움직이는 목숨붙이가 보입니다. 무상(無想)은 놀라움으로 깨집니다.

  

   아기 산토끼가 덤불에서 나와 길가에서 햇살을 쬐고 있습니다. 발걸음이 저절로 멈춰집니다. 산토기와 친해지고 싶습니다. 눈높이를 맞추려 서너 발자국 더 다가가 철퍼덕 주저앉습니다. 옆으로 한 마리가 더 보입니다. 크기나 생김새가 똑 같습니다.

    오물거리는 입과 쫑긋거리는 귀로 ‘오늘은 뭘 하고 놀지?’ 소곤거립니다. 끼어들어 함께 이야기하고 놀고도 싶습니다. 눈 맞춤을 하려고 시선을 양쪽으로 번갈아 보냅니다. ‘눈(眼) 나눔’ 이야기는 색깔이 다른 눈동자들과는 쉽지 않습니다. 참고 기다립니다. 그런데 아뿔싸, 아래 쪽 자동차 길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고 이어서 앰뷸런스가 달려옵니다. 산토끼는 덩굴 속으로 잽싸게 뛰어들어 사라집니다. 엉덩이에 똑같은 크기에 똑같은 하얀색의 둥근 반점을 지닌 그들은 친형제가 틀림없습니다.

    서서히 떠오른 햇살이 온 누리를 밝히며 새날을 엽니다. 하늘과 땅위의 모든 목숨붙이에게 생명의 원천(源泉)을  펼쳐줍니다. 이 아침녘에 장닭과 아기 산토끼 형제들을 함께 만났습니다. 가슴 설레는 ‘내 이야기’로 만들어 준 이들의 만남은 기쁜 소식의 전령(傳令)입니다. 가슴 뿌듯함을 고이 간직해, 다음 달 산행부터는 산마루까지 오르는, 소박한 바람으로 지니렵니다. (2012/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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