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바다…황량한 들판
페이지 정보

본문
쪽빛 바다…황량한 들판
태초에 하늘과 땅이 열리기 전에는 바다와 하늘도 하나였음을 보여주려는 듯, 짙디짙은 먹구름이 하늘과 바다를 휩쓸어 안고 그 위에 군림(君臨)하고 있습니다.
한순간의 쉼 없이 억천만겁(億千萬劫)의 윤회로 들숨과 날숨으로 온 누리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에게 맥박(脈搏)을 이어준 바다의 숨결, 이 숨결마저 지극히 낮게 가라앉습니다.
지난 토요일 아침녘, 채널아일랜드 국립공원(Channel Islands National Park)으로 가는 여객선(cruise ship) 이층 고물(船尾)에서 바라본 바다는 장엄하고 정숙하기만 합니다.
여객선이 방파제를 벗어나자, 바닷길을 알려주는 빨간색 부표(浮漂) 위에 물개 세 마리가 햇살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머리와 꽁지를 이어 붙여 몸과 몸으로 동그라미를 만든, 가족인 듯싶습니다.
바다, 태평양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율동(律動)을 봅니다. 갈매기들이 무리를 지어 날고, 돌고래가 쏜살같이 내닫으며, 혹(hump-back)고래가 내뿜는 물기둥이 솟습니다. 사람이 만든 유리통과 울타리 안에 갇혀서 던져주는 먹이를 받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아닌, 바다에 사는 생명들이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그들 본래의 삶을 일구는 ‘삶의 현장’입니다.
국립공원은 LA 북쪽 Ventura Harbor에서 쾌속정으로 한 시간 남짓 거리에 5개의 섬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날 목적지 Santa Cruz Island는 길이 25마일, 폭 5마일에 6만5천 에이커 면적으로 제일 크고, 해발 2,434 피트의 등성이도 안고 있습니다.
고맙게도, 선착장 도착 직전에 춘삼월(春三月) 햇살이 펴지기 시작합니다. 햇살이 먹구름을 서서히 쫓아내자 하늘과 바다는 본래의 푸르름으로 돌아오고, 그 햇살은 쭈글쭈글한 노안(老顔)에도 내려와서 동안(童顔)으로 바꿔줍니다.
바위에 90도 직각으로 매단 철제계단을 선원의 도움을 받으며 오르자, 왜인지 황량(荒凉)한 느낌이 다가옵니다. 선착장에 연이은 길섶에는 핏빛을 토해내는 쇠락(衰落)한 고철들이 널브러져 있습니다. 이 널브러짐이 내뿜는 내음은 진하게 펴집니다.
《Justinian Caire 일가가 1880년부터 1984년까지 104년 동안 Santa Cruz Island에서 거주할 때 사용하던 트랙터 등 농사짓던 도구들을 그대로 방치했습니다. 그리고 1997년에 섬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자 후예들은 모두 섬을 떠났고, 이후부터 National park service는 이 섬의 토종식물을 복원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앞으로 인간의 흔적을 지우고 옛 모습을 찾을 것이라고 합니다.》
註 :‘《’와 ‘》’로 표시한 위의 글은 2008/12/16에 발표된 신명식·고경옥의 컬럼 <미국 대륙 일주기>를 참조해서 썼습니다.
Cavern Point Loop 길로 들어서자, 들판은 푸르름을 제친 누르스름한 색깔을 보입니다. 백색에 회색을 덧칠한 듯싶은, 헐벗은 흙은 아직 들꽃들이 피어나기 전이기에 메말라 보입니다. 이 척박함은 군데군데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황량(荒凉)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늘과 바다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자, 하늘은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 끝까지 파아랗게 내려왔으며, 이에 바다는 짙은 쪽빛으로 빛을 내며 ‘내 품에 안기라’고 유혹합니다. 이 유혹은 시심(詩心)으로 이끕니다.
어느 때는 행복한 바다가 육지 아래로
연주 않는 하프처럼 놓여 있을 때가 있다.
한낮이
그 소리 안 나는 현(鉉)을 왼통 금빛으로 칠하며 눈에 보여주는 불타는 음악으로 만든다 팽팽한 현의 불 사이 반짝이는 거울
……
이랑 진 모래와 물 위를 떠도는 나비
영국의 詩人 Stephen Spender의 <바다 풍경 Seascape>의 일부.
스펜서는 그의 自作詩 해설에서 “바다 풍경……그것은 내 머리 속에 그려 본 풍경이다. 해안 밑으로 배열된 작은 파도들의 줄은 흡사 햇볕을 받아들인 하프의 鉉이다……. 그런데 나비들이 물결을 들판인줄 알고……”라고 밝혔습니다.
산보다 바다를 먼저 찾았습니다. 꼬맹이 때 주안 염전의 잔잔한 파도는 힘을 빼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 몸이 뜬다는 것을 가르쳐주었고, 이는 바다 찾아가는 빌미를 주었습니다. 한창나이 때는 서울서 가까운 인천 여객부두에서 떠날 수 있는 시도·용유도·무위도·영종도·덕적도·백령도 등지를 돌아다니며, 망망대해를 동경했습니다. 이민 초기 뉴욕서는 롱아일랜드 끝에 자리한 대서양 앞의 Orient Beach Park에서 Mayflower호가 남긴 발자취를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이곳 LA지역에 옮겨와서는 나이 듦을 억지로라도 아니라고 우길 수 없게 되자 ‘태평양 저쪽 끝까지 가면 거기에는 고국이 기다리고 있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서 허우적거리게 했습니다.
바다 풍경은 찾는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내온 삶의 연륜에 맞는 깨우침을 주는 듯싶습니다. 돌아오는 뱃길, 모처럼 번잡한 도시로부터 벗어났음을 확인하려는 듯 멀리서 다가오는 F'way 101 도로가 반갑지 아니했습니다. (2012/03/2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