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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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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lbert
댓글 0건 조회 545회 작성일 12-0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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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斷想

  

   생각하는 것마저 내일이 아닌 어제로, 그것도 훌쩍 반세기 너머로 되돌리게 하는, 나이 들어간다는 늙음은 몸과 마음에 또 한 층의 더께가 얹혔음을 뜻합니다. 이 더께를 새삼스레 확인하게 되는 설날을 맞고 지낸 감회(感懷)는, 세월의 덧없음과 함께 열두 서너 살 적 추억으로 되돌립니다.

     

   억센 억양으로 “써울내기 따마내기…”라고 놀려대는 경상도 말투에 주눅(왕따) 들었던 꼬맹이 귀에는, 해맑고 나근나근하게 울리는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가 살갑게 다가왔습니다. 1-4후퇴 때 대구 부산을 거쳐 인천 학익동에서의 소년기를 보내고, 용산경찰서 옆 원효로로 올라와 용중에 다녔습니다.

    꼬맹이들이 설날아침에 먹으면 쑥쑥 자란다는 떡국, 평범한 떡국이 아닌, ‘조랭이떡’으로 끓인 개성(開城)식 떡국을 제대로 맛보지 못한 아쉬움이 여태껏 남습니다. 조랭이떡은 기계로 뽑은 가래떡을 칼로 썬 것이 아니고, 시루에서 쪄낸 떡을 오로지 손끝으로만 하나하나 단단하게 공글러 그것도 지름 5-7mm의 작은 크기로 빚은, 개성지역 부녀자(婦女子)의 성정(性情)의 결정체입니다. 이곳 한인타운 Vermont Ave에도 고국의 개성음식 전문점 ‘용수산(龍水山)’ 지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 여기서 부모님이 개성 토막이신 동서(同壻)와 조랭이떡국을 두어 번 맛보았으나, 그의 식후감은 매번 “어머니의 맛이 아니다”였습니다.

    피난 내려오기 전 개성에 살 때, 선친(先親)의 손위 고모님께서는 유년기의 꼬맹이를 늘 무릎에 앉혀놓고 강정 등 먹거리를 주시며 무척 귀여워하셨다고 합니다. 개성식의 강정, 식혜, 수정과 등도 독특한 맛을 지닌다고 하는데, 큰누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이일뿐이고 꼬맹이는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원효로 집으로 옮겨온 첫해 세밑에, 선친께서는 종로네거리로 꼬맹이 손을 이끌고 가서 ‘불빛놀이’를 보여주셨습니다. 화신 백화점 앞면을 통째로 차지한, 겹겹의 원통에 가로-세로-빗금 선이 합쳐져서 색색의 네온(neon)을 토해놓습니다. 여태껏 뇌리(腦裏) 깊숙이 자리한, 어둠에서 튀어나와 하늘에 화려한 수(繡)를 펼치는 불빛놀이는 황홀했습니다.

    고교 때는 ‘양력설 세어 허례허식 벗어나자’ 표어(標語)를 왼쪽 가슴에 달고 다녔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자나 깨나 불조심’ ‘자수하여 광명 찾자’ 등등 일 년 내내 무슨무슨 표어를 달고 다녔습니다. 여러가지 표어를 인쇄해 차곡차곡 접어 넣는 비닐 케이스가 필수품이기도 했습니다. 양력-음력설, 설날에 이르기까지의 변천사도 겪었고, 설날을 추석과 함께 3일 연휴의 명절은 이방인(異邦人)인으로 전락된 제게는 그저 그림의 떡입니다.

    연초부터 이곳에서도 〈연합뉴스TV〉가 지상파로 24시간 생방송되고 있습니다. 시험방송(Preview)으로 광고도 고국과 같습니다. 장례비용까지 내준다는 탤런트 이순재가 나오는 Silver보험에도 눈길이 머뭅니다. 이곳의 TV방송이 디지털로 송출되기 전에 20여 시간 늦던 뉴스와는 천양지차입니다. 지난주 목요일 오후부터 시작된 귀성 고속도로 현황을 한 시간마다 보여줍니다. 쌩쌩 내달려가는 하행 차량들을 볼 때는 부러웠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선 상행선에서 억지 위안을 삼습니다. 이민―실향민의 이중(二重) 멍에를 ‘내 논에 물대기’로 달랬으나, 이는 저의 마음가짐이 욕심을 떨치지 못한 간사스러운 탓입니다.

  

   먼저 가신 선각자들이, 스님이든 목회자이든 원로문인이든 한결같이 남긴 같은 가르침에 ‘마음비우기’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여생(餘生)에 무얼 더 하겠다기에 앞서, 지금의 나(我)에서 군더기를 덜어내라고 합니다. 하고 싶은 욕망 욕심을 스스로 덜어내 인위(人爲)가 아닌 자연(自然)에 다가서, 내 잘났다는 교만(驕慢)을 겸손하며 삼가는 겸허(謙虛)로 바뀌면 마음에 평온이 찾아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책갈피에서의 고개 끄덕거림일 뿐, 책 내려놓고는 곧바로 공염불이 됩니다. 보다 높게 산 오르고 싶고, 좀 더 장엄한 바닷가 석양(夕陽)에 잠기고 싶고, 훨씬 가슴에 와 닿는 사진(寫眞)도 얻고 싶습니다.

    어제 일요일 정오 무렵, 고국의 설날 새벽녘에 MT. Baden-Powell 산마루에 올랐습니다. 천상(天上)의 햇살이 빚은 파르스름하기보다는 연초록에 가까운 옥색(玉色)의 하늘에, 안개(山霧)라고 하기보다는 부드럽고 달디 단 솜사탕인 듯싶은 뭉게구름이 고만고만하게 솟은 산봉우리들을 품어 일망무애(一望無涯)를 펼칩니다. 방금 발 디디고 올라온 이승의 온갖 모습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불현듯, 억겁(億劫)의 윤회(輪廻)에서 평균수명 80년에 기껏해야 100세를 넘보는 사람의 한평생은, 뭉게구름 한 조각인양 부질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전율(戰慄)에 싸입니다. (2012/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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