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이야기(6)- 종교제도, 마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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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이야기(6)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11)제도 종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인간은 평등하며, 신은 아버지고 우리 인간은 형제 자매이라는것, 그래서 아버지를 공경하고 형제자매는 서로 사랑 하라는것 입니다. 얼마나 당연한 말 입니까. 예수 같은 성인이 말을 해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이 땅에 오기전에도 마땅히 그래야 되는 당위가 아니겠읍니까. 그러한데 마치 예수의 발명품 처럼 그의 가르침을 떠 받들고 가르침 문자에 지나치게 매달려 있읍니다. 할술 더 떠서 그리스도교라는 제도를 만들어 정치의 힘과 합세해서 절대 권한을 가지고 세상을 좌지 우지 한 때도 있읍니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상 초기만 제외하고는 그리스도교는 기금까지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실천도 많이 했지만 또한 아픔을 더 많이 주었다는 것이
저의생각 입니다.
지금도 한 편에서는 비만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굶어 죽어가고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투쟁으로 사랑하는 형님, 동생, 아버지 아들들이 죽어가고 있고 고통을 받는 일이 지금도 계속되고있읍니다. 교회의 재산 일부 이자만 으로도 기아로 죽어가는 어린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기사도 읽은적이 있읍니다. 만일 희생된 그들이 우리들의 가족이었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받아 드리겠읍니까. 이러한 것들이 예수의 가르침이 잘못되어 가는 증거의 극히 일부입니다.
이는 종교가 지나치게 제도화 한데 오지 않았나 생각됨니다.
물론 어떠한 사상을 효과적으로 전파 하기 위하여서는 최소한의 조직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제도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목적수행 보다는 제도관리에 힘을 더 기우리는게 되고 때로는 제도에 소속 되여 있는 사람들의 개인 및 집단 이익까지 합세하여 원래 바라던 제도의 목적이 상실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대표적으로는 정치집단이 그렇고 여러 비영리단체들 그리고 종교단체도 예외는 아닌듯 싶읍니다.
이제 제가 존경하는 한 성인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려 합니다. 크리슈나무르티(1895-1986), 그는 인도 출신으로 캘리포니아 오하이 밸리에서 살면서 영적 가르침을 위하여 영국, 미국, 인도, 남미 등 세계각지를 분주히 왕래하면서 일생을 바친분 이십니다. “신지협회”는 그를 세계스승이라고 말했고, 세계적인 영적탐구 조직인 동방성단(The Order of the Stat in the East)은 그를 동방성단에 수장으로 추대 하였었읍니다.
그는 동방성단이라는 제도를 이용하여 그의 가르침인“인간을 자유로 안내하기”를 펼쳐나갔읍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가르침 보다는 수장인 크리슈무르티 자신을, 조직 관리를 위하여, 가르침을 해석하는데에 에너지가 소실됨을 감지하였읍니다. 그리하여 그는 네델란드 암스테르에서 총회를 소집 과감히 세계적인 자신의 조직인 동방성단을 1929년 해체하는 결단을 내렸읍니다. 그는 지구를 떠난 성인중 가장 지금과 가까이 계셨던 분이 아닌가 합니다. 나는 고산 등반시 그분의 가르침을 텐트안에서 종종 읽곤 했읍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우주도, 물질도, 생명도, 생각도 끈임없이 변증으로 변화하며 흘러갑니다. 이 흐름속에는 기준삼을 만한것이 아무것도 없읍니다. 기준은 정지(명사) 입니다. 존재는 흐름(동사)입니다. 기준을 삼는 순간 주변상황은 바뀌고 있읍니다. 기준과 흐름의 상충 때문에 모순이 발생하고 개인은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때로는 순간적으로 행복을 느끼기도 합니다. 주변 즉 사회는 모순, 잘못, 부정, 투정, 종교에서는 죄, 이단, 반대,투쟁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또한 변증의 흐름에 속합니다. 인류는 흐름입니다.
12) 마치면서
그리하여 지금까지 불교, 이슬람교, 유대교에 그리스도교 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읍니다. 겨자씨 만한 지식을 가지고 우주보다 더 넓은 삶의 내적 외적 문제를 다루는 종교를 더듬거렸는데 무슨냄새가 났는지 모르겠읍니다.
선이던 악이던 인간의 행동은 어쩔수 없이 서로 영향을 주어왔고 앞으로 계속해서 상충과 조화를 이루며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종교같이 일반인에게 가려진 종교행위는 더욱 그러함니다. 남이 이야기 하니까, 목사나, 신부, 스님, 랍비 가 말하니까, 경전에 쓰여 있으니까 하며 순종하는 행위는 믿음이 아니라 미신입니다.
이제 다른사람의 종교를 통해서 나의 종교를 이성을 가지고 두루 살피는 노력이 필요함니다. 한종교만 아는 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며 만일 무엇을 알고 믿는다면 그것은 미신이라고 많은 학식있는 분들은 말함니다. 누구에 의하여 만들어진 제도종교보다 각자가 개인과 인류를 위한 삶의 통찰이 필요하다 하겠읍니다. 몇년전 세계 3대 생불중 한분인 '달라이마"게서 뉴욕 방문시 한 기자가 다른종교인이 ㅟ하의 종교에 대하여 이단시하는데 귀하게서는 이에 반응이 전혀 없었읍니다. ' 다른 종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 '는 질문에 ' 세상의 사람 숫자많큼 종교 숫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기사가 생각남니다. 세상의 모든사람은 서있는 위치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높은 차원에서는 각기 다른종교는 다름이아니라 공동 목표를 향하는 방법의 차이뿐임을 암시하는 대답입니다. 그러하니 투쟁보다 서로 존중하자는 대답인것 같읍니다.
의심이 없는 믿음은 맹종이고 미신이라 말들하지 않읍니까. 믿기(Believe)위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하여 믿는(Faith)것이라는 말도 있지 않읍니까.
어차피 종교라는 것은 삶의 환경에 의하여 주어진 선택입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교인 이라면 티벧에 태어 났으면 어차피 불교인 입니다. 선택은 주어지는 것이며 일단 주어지면 원래부터 자기것인양 착각하기도 하고 그리고 집착하기도 함니다. 그러나 잘못을 알았을 시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어 하는 수없이 계속 같은 길을 가면서 합리성을 찾으려 노력 합니다. 여기서 자신의 내면적 외면적 갈등이 생김니다.
그리하여 종교의 투쟁과 부조리는 계속됨니다.
이제 우리는 상대의 삶의 가치관을 존중하고 이해하므로서 공통점을 발견하여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그렇게 행동을 해야 되겠읍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를 포함한 다른종교를 객관적으로 (사실은 나의주관이 개입되여 있을지도 모름) 긍정적인 목적을 위하여 한 모퉁이를 더듬어 보려는것이 저의 의도 입니다.
지식이 지혜를 앞지르고, 문학이 과학때문에 외면당하고, 인터넷 편의가 인성을 파괴하고, 돈이 세상을 좌지 우지하고, 자극 선동문화에 생명이 넋을 잃어가는데 그것을 한류이니 하며 역사적 의미까지 부여하는 작금의 시대에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 했으면 하는 바램도 있읍니다.
종교 행위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행위(육체적, 정신적)는 “ 모두가 다 함께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 사는것”에 초점이 맞추어 져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더나가서 모든 존재와 함께.
지금 지구 곳곳에서 사랑 실천에 수고하시는 분들게 찬사를 드립니다. 목회에 열중하시는 나의 지인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각자 속해있는 종교의 신자로서 나름데로 열성을 다 바치는 분들에게 섭섭함을 끼쳐드렸으면 용서하십시오.
어떤분은 제글이 너무 길으니 짧게 써달라는 부탁을 댓글로 주셨는데 주제가 주제이어서 또 길어졌다는 변을 해야겠읍니다. 제참 말씀드린바 학문적인 고찰이 아닌 저의 그짧은 지식으로 적어 보았읍니다. 넉두리로 받아주십시오. 혹 결례한 사항이 있으면 용서를 빌면서 읽어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드립니다.
방문해주셔서 감사함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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