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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 대보름달, 사슴 삼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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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lbert
댓글 0건 조회 535회 작성일 10-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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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 대보름달, 사슴 삼형제

 

“달 달 밝은 달

쟁반 같이 둥근달

어디 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

 

   내일이 한가위 추석이기에, 저녁에 뒷산에 올라 떠오르는 보름달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돌아왔습니다. 넘어가는 햇살의 잔영(殘影)마저 스러지자 온 사방은 어슴푸레 잠기고, 이제 달빛이 고고(孤高)하게 떠올라 교교월색(皎皎月色) 휘영청 밝음을 내뿜습니다.

   그 밝음 한쪽에, 계수나무 아래 떡방아를 찧는 전설(傳說)의 옥토끼가 아닌, 사슴이 노닐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맏이는 아침햇살이 비치는 하늘을, 가운데 둘째는 맏이를 보고 있으며, 막내는 엉덩이를 내보이며 풀을 뜯고 있습니다. 한 달 전 같은 곳에서 우연히 만난 사슴 삼형제가 한가위 보름달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꿈속을 거닐듯 환상(幻想)에 묻히게 했습니다.

   사슴은 신선(神仙)사상에서 장생불사(長生不死)를 표시하는 십장생(十長生)의 마지막 대상입니다. 하지만 동시인(童詩人) 한 분은 잠든 아기의 순진무구(純眞無垢)를 꽃사슴으로 표현했습니다.

   “소로록 잠든 아가/꿈 속에서/꽃사슴 꽃사슴 타고 놉니다/부끄러워 눈을 꼬옥 감고 큰다/아기 사슴은 잠 잘 때만 큰다/ 아기와 키 대보고 기다리며 큰다.”

 

   이 사슴을 지난달부터 근 한 달 동안에 세 번이나 만나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처음은 금년 8월 19일, 늘 다니는 뒷산 길에서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멈추어졌고 고개를 쳐들자, 작년 10월에 만났던 아기사슴 삼형제가, 아기가 아닌 다 큰 그러나 여전히 자그마한 체구로 산마루 위에서 해맑은 자태를 보여주었습니다.

   가슴은 쿵쾅거리며 놀라움에 떱니다. 꽤 떨어진 거리여서 조심스레 카메라를 꺼내들고 급히 서너 장을 눌렀어도 사슴은 그 자리에 있습니다. 여유가 생기자 서너 걸음 다가가서 표준 단렌즈의 화각(畵角)에 최대한 맞추어 찍고, 카메라 세팅을 바꾸어 찍고, 뒤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에게도 가리켜 주었습니다.

   오후에 처(妻)로부터 기쁜 소식을 전화로 받았습니다. 1년여 넘게 애타게 기다렸던, 큰아이의 두 번째 폐이식(肺移植) 후의 염증을 일으켰던 원인균이 특수배양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사슴 삼형제가 기쁜 소식을 전해주려고 현신(現身)한 것입니다.

   그중 한 장을 20×30 inch 크기로 프린트해 거실에 걸었습니다. 넉넉한 크기이기에 아침녘 숲의 고요와 함께 향기도 품고 있습니다. 울적하거나 무료할 때는 사진 속의 사슴들에게 말을 겁니다. 사슴은 벽에서 나와 눈빛으로 응해줍니다. 몇 번 거듭하자 익숙해져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Sequoia 국립공원 야영 마지막 날인 이달 6일, Sherman Tree 주차장에서 보도로 발을 들여놓을 때, 숲에서 내 쪽으로 유연하게 다가오는 커다란 무엇이 언뜻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가가 사슴임을 확인하자 가슴은 콩콩거립니다. 일행에게 알리고, 사슴 두 마리가 사라질 때까지 온몸을 기쁨에 맡깁니다. 집에 돌아와 처에게 잘 다녀왔다고 전하고, 새 처방약 복용으로 큰아이의 운동양이 늘었다는 반가운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세 번째는 지난주 목요일인 16일 아침, 뒷산에서 내려오는 비탈길에서입니다. 서너 명의 사람들이 건너편 숲을 바라보고 있어 다가가니 건너편 숲 속을 가리켰습니다. 햇살이 역광으로 비춰 만든 그늘에 사슴 삼형제가 나뭇잎을 뜯고 있었습니다.

   불현듯, 내일 나오는 검사결과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달 8일 남가주에서 제일 높은 해발 11,501피트의 San Gorgonio 산에 올랐습니다. 정상 표지판이 있는 바위에 올라 증명사진을 찍고, 내 키만큼의 높이를 점프해 내려오다가 양쪽 가슴에 근육통을 느꼈습니다. 일행이 마사지를 해주어 바로 회복되었고, 별 탈 없이 산을 내려왔습니다.

   높이 올라 산소가 희박해서 앓는 고산병(高山病)은 피로, 두통, 구토 정도로 알고 있었기에, 혹시나 하는 걱정이 앞서 혈압약 처방전을 받는 내과를 찾았습니다. 이곳의 주선으로서 3주 후에 심장전문의의 첫 진료를, 다시 열흘 후에 감마선을 이용한 심혈관검사와 뜀틀 위에서 심전도검사 그리고 초음파 심장검사 등을 받았습니다.

   기다리는 일주일을 내내 ‘잘못되었기에 3시간 30분에 걸쳐 많은 검사를 했으리라’고 지레 겁을 먹고, 이어서 ‘심장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연이어 “산에 다니지 말라”는 처방을 받으면, ‘여생을 어찌 보내야 하는지?’ 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부인하고 싶은 마음이, 이곳에 거주하는 17회 동문 중에 심혈관 우회수술(by pass)을 두 번이나 받고 한쪽 폐만으로도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하고 매주 산에 더구나 앞장서서 오르는 한 분을 떠올렸습니다.

   예약시간보다 앞당겨간 17일 오전, 대기실에서의 초조함은 15분이 몇 시간처럼 한없이 느리게 다가왔습니다. 모두 정상이고, 검사결과를 내과로 통보하니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는 설명을 듣는 순간, 사슴이 보였습니다.

 

   고국의 추석명절 분위기는, 16시간 시차(時差)를 2시간으로 단축해서 보내주는 이곳의 지상파 TV화면을 통해 곧바로 전해집니다. 이곳 한국어 TV 방송의 추석 프로그램도 명절임을 확인시켜줍니다. 절 받고 송편 들고 농악무 보는, 해마다 비슷한 구성이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웃음과 표정도 거의 같습니다.

   하지만 이곳서 지낸 햇수가 늘어나면 자연스레 추석의 정취는 점차 줄어듭니다. 젊어서는 시간에 쫓겨 외면하고, 나이 들어 일손을 놓으면 어릴 적 기억을 더듬는, 고국산천을 그리워 할 뿐입니다.

   기껏, 기계에서 뽑혀 나오는 송편 모양 비슷한 떡 몇 개에 향수를 달랠 뿐이고, 그나마 이도 몇 년 지나면 이 ‘모양만의 송편’먹기도 시들해 집니다.

 

   남아있는 삶이 언제까지인지는 알 수 없으되, 금년 추석은 이미 맞이했기에 앞으로 맞이할 횟수에서 한 번이 빠져나갔음은 틀림없습니다. 명절맞이할 때마다 세월의 흐름은 화살과 같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하던 짓도 멍석 깔아놓으면 안 한다.”는 속담(俗談)이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고, 없으면 더 찾고 싶은 것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닌 마음의 한 단면(斷面)이기도 합니다. 유년기의 어리광이나 사춘기의 이유 없는 반항 등도 같은 범주(範疇)이겠으나, 이를 60대 후반을 훌쩍 넘어서 70대로 치닫는 내게서 찾게 되고, 이를 본 젊은이들은 ‘노망(老妄)들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나이 들어도 줄기는커녕 느는가 봅니다. 남에게 누(累)가 아니 되는 한에서 ‘내가 잘났다’를 내세우는 처세술(處世術)은 무방해도, 나를 내세우기 위해 남을 해코지하는 것만은 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억하심정(抑何心情)으로 남을 헐뜯으면 내 마음이 오히려 괴롭게 됩니다. 노년기일수록 마음이 먼저 편안해야 몸도 건강을 지닌다고 합니다.

   가을과 봄이 짧은 이곳도 이제 완연한 가을에 접어들어, 계절의 순환은 어김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다지 높지 않은 산에 오를 때도 더위를 느끼기 어렵고, 산마루에 이르면 찬바람이 바람막이 윗도리를 걸치게 합니다.

   벌써 금년도 석달 남짓 남기고 있습니다. 어둠에 익숙한 산길이지만, LED 헤드램프 불빛을 따라 내려오면서 대보름달에 간절히 빌었습니다. 늘그막의 여생(餘生)을 멥새 우(愚)를 떨쳐 욕(辱)됨 없이 흙으로 고이 돌아가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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