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火魔)가 휩쓴 산에 새 생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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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 Canada 입구에서 시작되는 2번 Angeles H'way 동쪽 방향의 길은 한동안 통행이 차단되었습니다. 다시 열린 길에 들어서자, 지난해 발생한 산불과 뒤이어 계속된 폭우의 피해가 엄청났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회색지대(灰色地帶)’의 느낌보다는 ‘흑색(黑色)지대’라는 조어(造語)를 떠오르게 합니다.
한해살이 잡풀과 덩치 작은 나무들은 전부 타버려 흔적도 없어지고 대신 으스스한 시꺼먼 음영(陰影)만 보여줍니다. 내 키의 두서너 배 높이의 이름 모를 나무들은 새까맣게 남은 몸통과 가지로 휑한 날갯짓을 퍼덕이며, 바람을 가르고 있습니다. 널브러진 바위들과 돌무덤들 역시 회색물감을 온통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어둠의 적막(寂寞), 숲이 불타버린 산자락들은 흘러내린 빗물의 자국 따라 실핏줄을 드러내, 풀어 헤쳐진 노파의 앞가슴처럼 산은 속살을 내보이고 있습니다. 굽이굽이 등고선처럼, 때로는 가파르게 쳐 오르는 이 흑색지대는 햇살의 방향에 따라 흑갈색, 적갈색, 암회색 등으로 시시각각 변합니다. 마치 공포영화에서 관객의 혼을 빨아들이는 첫 시작 때의 장면처럼.>
<내려오는 2번 도로 양편으로 검게 타버린 나무들이 마치 열병식(閱兵式) 때 ‘받들어총’ 자세로 늘어서 있습니다. 화마(火魔)에 휩쓸린 산자락들은 스스로 회생될 때(30여년 쯤)까지 그대로 놔둔다고 합니다. 졸자의 생전에는 이뤄질 수 없기에, 억겁(億劫)의 세월흐름에서 티끌보다 못한 존재임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길게 인용한 위의 네 구절은, 금년 1월 3일과 10일 산행후기에 남긴 졸문의 일부입니다. 지난 일요일(27일), 다시 폐쇄된 2번 도로를 멀리 Sunland 지역의 Tujunga로 돌아 Mt. Waterman에 다녀왔습니다. 1월에 지나간, 같은 길의 동쪽에 자리한 이곳도 화마가 지나간 곳입니다.
비와 눈과 바람 그리고 햇살이 음산한 회색의 음영을 지워, 바위와 돌 그리고 맨살의 흙을 제 색깔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새까만 고사목(枯死木)은 그대로이나, 새 생명이 움터 자라고 있습니다. 한해살이의 이름 모를 풀 더미들은 산자락 곳곳에 자리해, 기계충(頭部白癬) 흔적을 지닌 빡빡머리를 보여줍니다. 새생명의 돋아남을 보고서, 왜 하필 빈곤의 상징이었던 기계충이 연상되는지, 이는 졸자의 마음가짐 탓이겠습니다.
한 달 넘게 계속된 화마가 휩쓴 지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았으나, 땅의 정령(精靈)은 첫 결실을 땅위로 올렸습니다. 황량한 산자락에 다시 돋아 오른 생명력은, 달리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경외(敬畏)이자 자연이 준 보시(布施)입니다.
이삼년 전부터 마음 한구석에 자리해 떨치지 못하는, 기껏 팔구십년 살다가는 사람 한평생은 자연의 섭리(攝理)에서 얼마만큼의 존재일까 되뇌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목숨 있는 모든 생명체는 모두 같습니다. 흙 속의 지렁이, 산자락의 풀 한 포기, 산등성을 넘나드는 들짐승 한 마리, 허공을 나는 조그만 새 한 마리, 그리고 사람도 끝내는 한 줌 흙으로 돌아가기에, 이 모두는 천상(天上)에서 굽어보면 ‘도토리 키 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 일컬어 다른 생명체보다 우월하다고 뽐내고, 이는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고 자연훼손도 마다하지 아니 했습니다. 이곳의 연례행사처럼 치러지는 산불의 대부분이 자연발화가 아닌 사람에 의한 방화(放火)로 일어난다고 합니다.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젊었을 때는 미쳐 생각이 닿지 못했던 사유(思惟)의 범위를 넓힌다는 뜻도 있습니다. 찾는 이의 심성(心性)에 따라, 산은 그에게 알맞게 산의 품을 열어줍니다. 같은 산을 올라도 오를 때마다 다른 감회(憾悔)를 줍니다. 때문에 산을 찾을수록 사람의 마음가짐은 겸허(謙虛)해진다고 감(敢)히 말하고 싶습니다.
폭우(暴雨)가 할퀸 황토에, 척박한 자갈밭에, 바위너설 길에, 나약한 사람의 헤아림으로는 도저히 뿌리를 내리지 못할 땅에도 생명의 움을 틔웁니다.
얼마 전, 6천 피트를 수직으로 내려오는 케이블-카에서 또 다른 생명의 경외에 전율(戰慄)했습니다. 깎아지른 절벽 틈바구니에서 잡풀들은, 일몰(日沒)의 햇살을 비껴 받고 ‘살아있음’을 참고 견디어내는 삶이 무엇인지를 실존(實存)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해발 9천4백 피트 산마루에 군림(君臨)한 수령(樹齡) 1천5백 년의 소나무는 그의 위엄(威嚴)으로 보는 이를 한없이 움츠려들게 합니다.
사유를 맡는 뇌세포는, 새벽녘 해 떠오르기 직전의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희뿌연 숲의 고요에서 가장 왕성하게 움직인다고 합니다.
“생자필멸 회자정리(生者必滅 會者定離), 생명 있는 것은 반드시 죽을 때가 있고,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 ― 이는 살아있다는 사실에 그 자체만으로도 늘 고마움을 지녀야 하며, 또한 순간순간마다 충실 하라는 가르침과 다르지 아니 하겠습니다.
뒷산 내려오면서 마음을 다잡지만, 이는 단지 이 때뿐입니다. 운전대 잡으면 신호등에 따라야하듯, 불과 20여분 만에 寓居(우거)에 도착해서는 뒷산 오르기 전으로 돌아갑니다. - 궤변(詭辯)을 늘어놓았습니다.
나이 들어서 욕심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 하찮은 일에도 일희일비(一喜一悲), 아옹다옹 다툽니다. 졸자에게 철들기는 나이와 상관없이 한평생 ‘오르지 못할 나무’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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